나를 화친의 제물로 바친 남자

GoodNovel 완결

세자가 시험을 통과하고 내게 청혼하던 날, 여빈족에서 온 화친 사절단이 난입하면서 그 자리를 가로막았다. 여빈족은 변경의 10년 평화를 대가로 내 여동생을 6번째 첩으로 들이길 원했다. 전하께서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더니 그 자리에서 여동생을 양녀로 삼으셨다. 여동생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통곡하면서, 내가 90살이나 된 늙은 족장과 내통했다고 모함했다. 그러자 격노한 세자는 검을 뽑아서 당장이라도 여동생을 베려고 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으려던 순간, 눈앞에 난데없이 글귀가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저까짓 잔꾀로는 남주를 속일 수 없어!] [증거는 바로 저 여자 몸에 있어!] 나는 글귀가 알려 준 대로 증거를 찾아냈다. 그날 밤, 여동생은 입이 틀어막힌 채 윤경 밖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나는 동궁에서 일찍이 마련해 둔 운반 대열만 무려 10리에 이르는 혼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혼례 당일,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전해졌다. 여동생이 윤경을 벗어나자마자 자객의 습격을 받아서, 시신조차 온전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숨이 끊어지기 전 혈서를 남긴 여동생은 세자를 향한 연심을 절절하게 토로했다. 이튿날부터 윤경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입막음을 하려고 사람까지 죽였다는 것이었다. 세자는 지체 없이 그 말을 퍼뜨린 자들의 혀를 베어 버리며 나를 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여동생을 닮은 여인들을 하나 둘 들이면서, 세자빈인 나를 허수아비 취급했다. 급기야 보위에 오른 뒤에는 중전이 된 나를 별궁으로 내쫓았고, 밤낮으로 여동생의 위패 앞에 무릎 꿇고 속죄하라고 했다. 죽는 날까지 다시는 나와 마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내 목숨이 다해 갈 무렵, 왕은 내게 독주 한 병을 내려서 삶을 끝내게 했다. 탁하게 흐려진 두 눈에는 반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던 다정함이 피어올랐다. “부인, 이승에서 부인의 죗값은 다 치렀소.” “다음 생이 있다면, 맹세코 부인을 아끼고 잘 대해 주지.” 독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동생이 나를 모함하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자는 검을 휘둘러 증거를 박살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글귀도, 피가 흐르는 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는 죄를 청했다. “소인, 감히 세자 저하를 넘보지 않겠습니다.”

챕터 (1)

第1章

세자가 시험을 통과하고 내게 청혼하던 날, 여빈족에서 온 화친 사절단이 난입하면서 그 자리를 가로막았다. 여빈족은 변경의 10년 평화를 대가로 내 여동생을 6번째 첩으로 들이길 원했다. 전하께서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더니 그 자리에서 여동생을 양녀로 삼으셨다. 여동생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통곡하면서, 내가 90살이나 된 늙은 족장과 내통했다고 모함했다. 그러자 격노한 세자는 검을 뽑아서 당장이라도 여동생을 베려고 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으려던 순간, 눈앞에 난데없이 글귀가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저까짓 잔꾀로는 남주를 속일 수 없어!] [증거는 바로 저 여자 몸에 있어!] 나는 글귀가 알려 준 대로 증거를 찾아냈다. 그날 밤, 여동생은 입이 틀어막힌 채 윤경 밖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나는 동궁에서 일찍이 마련해 둔 운반 대열만 무려 10리에 이르는 혼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혼례 당일,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전해졌다. 여동생이 윤경을 벗어나자마자 자객의 습격을 받아서, 시신조차 온전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숨이 끊어지기 전 혈서를 남긴 여동생은 세자를 향한 연심을 절절하게 토로했다. 이튿날부터 윤경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입막음을 하려고 사람까지 죽였다는 것이었다. 세자는 지체 없이 그 말을 퍼뜨린 자들의 혀를 베어 버리며 나를 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여동생을 닮은 여인들을 하나 둘 들이면서, 세자빈인 나를 허수아비 취급했다. 급기야 보위에 오른 뒤에는 중전이 된 나를 별궁으로 내쫓았고, 밤낮으로 여동생의 위패 앞에 무릎 꿇고 속죄하라고 했다. 죽는 날까지 다시는 나와 마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내 목숨이 다해 갈 무렵, 왕은 내게 독주 한 병을 내려서 삶을 끝내게 했다. 탁하게 흐려진 두 눈에는 반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던 다정함이 피어올랐다. “부인, 이승에서 부인의 죗값은 다 치렀소.” “다음 생이 있다면, 맹세코 부인을 아끼고 잘 대해 주지.” 독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동생이 나를 모함하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자는 검을 휘둘러 증거를 박살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글귀도, 피가 흐르는 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는 죄를 청했다. “소인, 감히 세자 저하를 넘보지 않겠습니다.” 제1화 “오만방자하구나!” 이백헌의 눈빛이 삽시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오랫동안 용상에 앉아 있던 왕의 위엄이 천지를 뒤덮을 듯 나를 향해 덮쳐왔다 이백헌도 다시 환생한 것이었다. 날카로운 검이 방향을 돌려 나를 향해 찔러 들어오던 순간, 이백헌의 눈 밑에 떠오른 기쁨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다음 생에는 한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겠다던 그 약조는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눈을 내리깔고 두 생에 걸친 쓰라림을 무겁게 삼켰다. 곁에 있던 하지언은 더욱 어리둥절한 모습이었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곧 원래 하지언을 향해 있던 검을 돌연 거두더니 곧장 나를 찔렀다. 자신을 위해서 이백헌이 나를 찌르는 걸 보자, 하지언의 눈에는 기쁨이 차올랐다. “전하, 부디 소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언니가 신분을 숨긴 것은 필시 한때의 장난이었을 뿐이니, 이를 정말로 그런 거라고 여기시면 아니 됩니다.” “세자 저하와 언니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인데, 그 정을 어찌 다른 이가 견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소녀가 말을 함부로 놀린 탓입니다. 그러니 소녀가 언니를 대신하여 머나먼 곳으로 화친을 가겠습니다.” 댓글창들이 미친 듯 빠르게 흘러갔다. [저 여우가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네! 남경아, 두려워하지 마!! 저 여자 소매 안에 다른 증거가 또 숨어 있으니까!] [남주는 꿈에서도 네 이름을 부르는데, 어떻게 저런 여우 같은 여자의 몇 마디 말에 속겠어!] [두고 봐, 이제 남주가 여주를 지켜 낼 때가 올 거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익숙한 손이 눈앞으로 뻗어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이백헌의 눈에 번지는 애틋함을 똑똑히 본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나직이 중얼거리고 말았다. “저하.” 손바닥의 아픔과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가 끊임없이 이 상황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이백헌은 더 이상 마음에도 눈에도 오직 나 하나만을 담았던 그 소년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이백헌이 나를 속인 것이 아니라면...’ ‘만에 하나, 이번의 삶이 죽음을 앞둔 이백헌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빌어서 얻은 것이라면...’ 그러나 가슴 가득 품었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한 듯, 돌아온 것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백헌이 하지언의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이백헌이 하지언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주자, 여자의 두 뺨은 부끄러움에 발갛게 물들었다. “지언아, 너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의 허물을 덮어줄 까닭도 없다.” ‘지언이라니...’ ‘남이라니...’ 내 눈시울은 삽시간에 붉어졌다. 전생에서는 머리가 희어지도록 40년을 함께했고, 이번 생에서는 3년 동안 정을 나누었다. ‘결국 난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줬네...’ 댓글창들도 들끓었다. [남주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설마 정말 저 여우의 말을 믿은 거야?] [여주야! 빨리 말해!] [증거가 저 여자 소매 안에 있잖아. 빨리 찾아내어 저 가증스러운 낯짝을 찢어 발겨버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감추었다. ‘다시 한번 진상을 밝혀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전생에서 왕의 권력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그 삶을 나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내 아버지는 진원군 하태석이고,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집안은 3대에 걸쳐 충절을 지킨 가문이었다. 나를 화친혼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왕실은 모든 사람의 비웃음만 살 터였다. 마침내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린 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자, 진원군에게 셋째 딸이 있는가?” 왕은 이백헌이 하나는 아내로 맞고 하나는 첩으로 들이려는 걸로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백헌은 무슨 우스운 말이라도 들은 듯 살짝 코웃음을 쳤다. “아바마마, 염려하지 마소서. 하씨 가문의 남경 낭자가 이미 저 여빈족의 늙은 족장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하니, 차라리 두 사람을 맺어주는 것이 낫습니다.” 그 말에 나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이백헌이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계집 하나를 주고 변경의 10년 평화를 얻는다면 족히 남는 장사입니다.” 제2화 왕은 탁자를 내리치며 연신 좋다고 외쳤다. “좋다, 좋아! 과연 내 아들답구나!” “아녀자가 정에 얽매이는 일을 어찌 변경 백성들의 안위와 견줄 수 있겠느냐?” [남주, 미친 거야?] [우리 남경이는 네가 첫눈에 반한 여자잖아. 목숨까지 내놓고 갈비뼈 7대가 부러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구해 낸 정인이잖아!] 확실히 그랬다. 이백헌은 나를 사랑할 때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다. 왕자일 때는 왕이 정성껏 고른 병권을 쥐고 있는 집안의 훌륭한 규수들을 3년 내리 마다했다. 세자로 책봉됐을 때는 혼사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99대의 매를 맞고도 상처 입은 몸으로 출정한 뒤, 북방의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개선하여 당당하게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을 내리겠다는 말에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두 무릎을 꿇고 온몸을 바쳐 세운 전공을 내세우며, 이름뿐인 진원군의 적장녀인 나를 자신에게 달라고 왕에게 청했다. [남경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남주가 정말 저 여우에게 넘어가 버린다고!] 댓글창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변한 사내에게 더 이상 나에 대한 마음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번 생만큼은 결코 운명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언이 한발 앞서 내 앞으로 몸을 던지더니, 나를 자신의 뒤로 단단히 감쌌다.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세자 저하께서 여러 해 동안 진원군의 적장녀를 마음에 품으셨다는 사실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언니를 갑자기 화친을 위해 보내신다면, 세상 사람들이 이를 두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언은 눈물 어린 눈으로 이백헌을 바라보았다. “비록 큰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고 언니의 외가에도 이미 대를 이을 이가 없습니다.” “허나 언니는 엄연히 진원군 하씨 집안의 장녀로 윤경에서 가장 존귀한 규수입니다.” “제 어미는 한낱 첩실에 불과합니다. 그런 어미에게서 태어난 소녀 또한 보잘것없는 서출이니, 소녀가 화친을 위해 여빈족 족장의 첩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언니의 근심을 대신 짊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소녀의 복이기도 합니다.” [남경아, 지금 증거를 꺼내지 않으면, 정말 저 여우의 계략에 빠져서 네가 대신 화친혼의 대상이 돼!] 댓글창이 재촉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백헌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돌연 차갑게 식는 것을 본 순간, 나 역시 이 일에 대해서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생에는 다시는 이백헌이 화를 푸는 도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앞으로 나아가 하지언의 소매 안에 든 증거를 잡아당겨 꺼냈다. “전하, 지금 제 동생이 거짓을 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늙은 족장과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이게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얇은 종잇조각은 곧바로 이백헌의 손에 빼앗겼다. 남자는 그 종이를 바로 짓이겨 버렸다. 내 손목을 거세게 움켜쥔 이백헌이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오만방자하구나!” 그러나 내 눈에 어린 절망감을 마주한 순간, 이백헌은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언은 너와 처지가 다르다. 오늘 이 혼사를 받아들이면 앞으로 어찌 살아가겠느냐?” “너는 고분고분 처분에 따르거라. 내게 다 생각이 있다.” 말을 마친 이백헌은 손을 들어 내 목덜미를 가볍게 눌렀다. 미처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은 모두 목구멍 안에 가두려는 듯했다. 그러고는 호위무사에게 나를 끌고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씨 가문의 남경 낭자가 어전에서 법도를 따르지 않았으니, 궁궐 정문 밖에서 세 시진 동안 무릎을 꿇게 하라.”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지만, 이백헌은 끝내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서 당장 데려가지 못할까!” 뒤이어 이백헌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하지언을 안심시키듯 눈길을 건넸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지언 낭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씨 가문의 적장녀인 남경 낭자가 장차 세자빈이 될 몸이자 진원군의 적장녀라는 신분으로 화친혼의 대상이 된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진언군의 첩이자 지언 낭자의 어미인 심씨 부인에게 정경부인의 품계를 내리신다면, 적장녀의 자리 또한 명분에 맞게 다른 이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여빈족이 바라는 화친의 뜻에도 부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장차 세자빈이 될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원군의 적장녀일 것입니다.” 이백헌은 그저 몇 마디 말로 내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 한때 내게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사내였다. 허나 지금 이백헌은 눈물로 흐려진 내 눈길을 외면한 채, 눈에 웃음을 머금고 다른 여인을 바라보았다. “지언아, 그리하겠느냐?” 제3화 호위무사에게 끌려 나가던 순간, 나는 하지언이 울먹이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소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저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궁궐 정문 밖에서는 궁인들이 경사를 알리는 종을 천천히 울리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마침 궁을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진원군 하태석은 사람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채 사람들의 아첨과 축하를 듣고 있었다. “대감, 감축드립니다! 듣자 하니 세자 저하께서 대감댁 규수를 지극히 연모하시어, 이승에 있는 한 결코 첩을 들이지 않겠다 하셨다지요.” “이토록 큰 총애를 받으시니, 대감께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가득했던 아버지의 얼굴은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발견한 순간 돌처럼 굳어졌다. 곧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대신들을 하나하나 돌려보냈다. 그리고 화를 애써 억누르며 내 어깨의 혈을 풀어주었다. “남경아,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벌써 아흔아홉 번이나 울렸거늘, 설마 세자빈이 바뀐 것이냐?” 아버지를 본 순간, 지난 생과 이번 생에서 억눌렀던 설움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대로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들면서 목 놓아 울었다. “아버지, 지언이가 세자 저하께 시집가려고 제가 여빈족 족장과 사통했다고 모함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거칠게 밀쳤을 때도 내 눈에는 우스울 정도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벌을 받았으면 얌전히 무릎이나 꿇고 있거라.” 나는 멍하니 아버지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전생에서 하지언에게 화친혼을 명하는 어명이 내려졌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는 마치 10년은 늙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아버지의 마음속 딸은 오직 하지언 하나뿐인 것 같았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그리움과 설움을 끝내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벌을 받을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나는 떨리는 두 다리를 이끌고 한 걸음씩 내디디며 집으로 돌아갔다. 육조거리에는 채색 등이 가득 걸려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넘쳐났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장차 세자빈이 될 거라며 축하하던 나인들은, 이제 나를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대했다. “아씨께서는 오늘 밤 안으로 행궁으로 거처를 옮기셔야 해요.” “지언 아씨와 세자 저하의 경사스러운 일에 액운이 들지 않도록 말이에요.”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유모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남겨 주신 물건을 모조리 챙겨 달라고 했다. “유모, 이제 내게는 유모밖에 없어.” 오늘부터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어찌 되었든 궁 안에서 죽는 것보다는 화친을 가는 편이 나았다. 미리 준비햐소 윤경을 나선 뒤 닥쳐올 그 습격만 피한다면, 어떻게든 유모와 함께 살아남을 방도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짐을 막 다 꾸렸을 때 하지언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한낱 서출 주제에 우리 하씨 집안의 금은보화까지 가져가려는 거야?” 유모는 본능적으로 나를 등 뒤로 감쌌다. 그러나 하지언은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를 뽑아 유모의 얼굴을 사정없이 찔렀다. 순식간에 유모의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봐라, 물건을 훔친 이 늙은 계집을 몽둥이로 때려죽여라!” 나는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비녀는 어머니께서 손수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혼례 장신구였다. “하지언, 네가 감히!” 그러나 내가 치켜든 손을 아버지가 거칠게 쳐냈다. 곧이어 아버지의 손바닥이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하지언은 한술 더 떠 응석을 부리듯 뒤에 있던 사람을 끌어냈다. “저하께서 한번 시비를 가려 주세요. 저희의 경사로운 일이 있기에, 저는 언니에게 좋은 기운을 나눠서 시집보내려고 하였습니다.” “허나 언니의 천한 계집종이 제 혼수를 훔쳐 가려 했습니다.” 이백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장을 쳐서 죽여라.” 가슴이 아려오면서 나는 황급히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었다. 가늘고 연약한 목을 치켜들고 말했다. “소녀가 세자 저하께 자비를 청합니다. 유모와 이 물건들은 어머니께서 소녀에게 남겨 주신 유일한 유품입니다.” 나는 이백헌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전생에서 하씨 집안의 백명이 족히 넘는 식솔을 지키기 위해서, 이백헌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 자세야말로 이백헌의 보호 본능을 가장 쉽게 일으키는 자세이기도 했다. 확실히 이백헌의 눈에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기색이 스쳤다. “방금 뭐라 하였느냐?” 제4화 이백헌은 곧장 앞으로 다가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네 어머니께서 남기신 것이라면 당연히 네 것이니라.” “소인, 세자 저하께 감사드리옵니다.” 나는 상처를 닦아주려는 이백헌의 손을 눈치채지 못하게 피한 뒤, 유모를 일으켜 세우고 궤짝을 챙겨서 밖으로 향했다. 이 문만 나서면 된다. 그러나 하지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이백헌의 옷소매를 붙잡고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 “제가 언니만 못한 건 제 팔자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어미는 내세울 만한 가문도 없고 좋은 혼수도 마련해 줄 수 없으니, 저는 저하께 시집갈 자격이 없나 봅니다.” 하지언의 울음에 이백헌의 마음이 온통 흔들렸다. “네게 모자란 것은 내가 모두 채워 주마. 누가 감히 너를 비웃는다면, 내가 그자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하지언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하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제가 언니를 대신하여 화친을 가게 해 주시옵소서.” 이백헌은 하지언의 입을 살며시 막고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하고는 손짓을 한 번 했다. 순식간에 호위무사가 내 손에 들린 궤짝을 빼앗아 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분명 제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백헌의 눈에는 다소 난처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냥 두고 가거라. 어차피 네가 가져가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이백헌은 목소리를 낮추면서 내게 약조했다. “내가 약조하마. 화친을 가는 길에는 사병을 붙여 너를 지키게 하겠다.” “3년이다. 네가 고생할 시간은 고작 3년뿐이니라.” “때가 되면 내가 친히 너를 데리러 가마. 이 물건들도 그때 모두 돌려줄 것이다.” ‘3년 뒤라니.’ 그때는 이백헌이 왕위에 오르는 날이었다. 나는 이백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소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나오자 이백헌의 얼굴도 차갑게 굳어졌다. “혼자 여빈족 촌으로 가고 싶다면 그리 해도 좋다. 본국의 법도에 따르면 정실만이 선산에 묻힐 수 있다.” “내가 특별히 아바마마께 청하여 네 어머니만큼은 선산에서 이장하지 못하도록 어명까지 받아 두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리 불만이냐?”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이백헌의 말을 듣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웃다 보니 눈물이 흘렀다. 몇 번이고 이백헌을 믿었던 어리석었던 내가 우스웠다. 전생에서 별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병으로 쓰러졌다. 그때 유모가 호위무사가 뽑아 든 칼날에 자신의 몸을 그대로 던졌다. 사람이 죽을 지경으로 일을 크게 벌이고서야 겨우 내게 어의를 불러올 수 있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유모를 지킬 것이야. 어머니의 유해도 지킬 거야.’ “좋습니다. 저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유모, 가자.” 사람의 발길마저 끊긴 행궁에서의 나날은 별궁보다도 고달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흘만 지나면 이백헌과 하지언의 혼례일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내가 여빈족 땅으로 떠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하지언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줄은 몰랐다. 하지언은 장차 세자빈이 될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나를 연회에 불렀다. 나는 당연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백헌의 호위무사가 몸소 나를 데리러 왔다. 그제야 갈지 말지는 이미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뜰 안으로 들어서자 잇따른 비웃음이 들려왔다. “세자 저하께서는 참으로 사람을 보는 눈이 밝으시구나. 지언 아씨처럼 사랑스러운 분을 택하셨으니 말이야.” “남경처럼 날마다 얼굴을 빳빳이 들고 고고한 체하는 사람과는 다르지.” “그러고 보니 정숙한 척만 했던 게지. 그 늙은 사내까지 꾀어내려고 했다지 않아.” 눈을 내리깔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시녀가 건넨 술잔을 받아 들고 허리를 숙여 올렸다. 그리고 하지언은 놀란 토끼라도 된 듯 황급히 술잔을 받아서 단숨에 비웠다. “언니께서 어찌 제게 술을 올리십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백헌은 하지언이 다 비운 술잔을 웃으며 받아 들었다. “내일이 지나면 천하에서 가장 귀한 여인이 될 터인데, 무엇이 몸 둘 바를 모를 일이냐?”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하지언은 입에서 피를 토하더니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이백헌의 품으로 쓰러졌다. 이백헌은 홱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감추지 않은 분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여봐라, 하남경을 잡고 어의를 들라 하라!” 모든 사람이 우르르 무릎을 꿇었고, 내 주변에는 나를 향한 칼날이 가득했다. “저하, 이 독은 여빈족에서 쓰이는 기이한 독입니다.” “독을 쓴 자의 심장 가까이에서 피를 받아야만 해독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옷깃을 풀었다. 이백헌 역시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고, 곧바로 단도를 들어 내 가슴을 갈랐다. 마치 내가 범인임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가슴에서 받아 낸 피가 천천히 한 사발을 채웠고 하지언도 깨어났다. 눈앞이 캄캄해졌던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윤경을 빠져나가는 마차 안이었다. 눈시울이 새빨개진 유모가 삼계탕 한 사발과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아씨, 이번에는 아씨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네요.] [지언 아가씨가 이번에 벌인 일도 그저 세자 저하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저지른 것이니, 한낱 깊은 연정에서 비롯된 일일 뿐이죠.] 나는 유모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고 삼계탕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이튿날, 혼례가 열렸다. 붉은 혼례복을 차려입은 이백헌이 세자빈이 될 여자와 함께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왕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똑똑히 본 순간, 한 생을 건너 이루어질 소원이 순식간에 믿을 수 없는 현실로 뒤바뀌었다. “어찌하여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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