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딸의 뒤늦은 후회

GoodNovel 완결

광복절 연휴를 맞아 나는 한 달 전부터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출발할 날이 다가오자 모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폭우가 쏟아지는 길거리에 홀로 서서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딸의 차갑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지금 아저씨랑 밥 먹고 있어요. 우리는 여행 안 갈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고, 나는 곧바로 차단당했다. 모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부러 집 문까지 잠가 나를 밖에 세워 뒀다. 나는 추위에 떨며 꼬박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전날 밤 폭우까지 흠뻑 맞은 탓에 나는 그날 밤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모녀는 심우진과 함께 여행을 떠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결혼 생활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챕터 (1)

第1章

광복절 연휴를 맞아 나는 한 달 전부터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출발할 날이 다가오자 모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폭우가 쏟아지는 길거리에 홀로 서서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딸의 차갑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지금 아저씨랑 밥 먹고 있어요. 우리는 여행 안 갈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고, 나는 곧바로 차단당했다. 모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부러 집 문까지 잠가 나를 밖에 세워 뒀다. 나는 추위에 떨며 꼬박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전날 밤 폭우까지 흠뻑 맞은 탓에 나는 그날 밤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모녀는 심우진과 함께 여행을 떠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결혼 생활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제1화 눈을 뜨자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밀려왔다. 온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머릿속은 멍했고,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고서야 어젯밤 집 앞에서 쓰러진 나를 이웃이 병원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문득 딸아이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우진 아저씨.’ 심우진. 아내 송서연의 첫사랑이었다. 한낮의 병실에서는 다른 환자와 가족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하지만 내 침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송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SNS를 열어 보니 송서연이 얼마 전 올린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광복절을 축하하며.] 사진 속 송서연과 심우진은 딸아이를 양쪽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셋 다 손에 작은 태극기를 든 채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세 식구였다.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음이 쓰리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일이 워낙 잦다 보니 이제는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나는 그 게시물에 좋아요까지 누른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뒤로도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내내 송서연은 딸을 데리고 심우진과 놀러 다녔다. 퇴원하는 날까지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나는 혼자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안에서 송서연과 강하은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곁에는 포장부터 고급스러운 값비싼 선물 상자들이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차갑고 거만한 눈빛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말을 걸어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송서연이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 “강도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며칠 동안 연락 한 통 없다가 이제야 들어와? 아빠라는 사람이 그게 할 짓이야?” 기가 막혔다. 송서연은 딸과 심우진이랑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내가 수십 통이나 전화를 건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잘못은 늘 송서연이 해 놓고, 끝에 가서는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겼다. 더는 따질 마음도 없었다.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송서연은 또 내가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듯했다. 송서연은 경멸하듯 나를 흘겨보더니 새로 한 네일아트를 살펴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강도윤,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인데? 나랑 하은이가 당신이랑 여행 안 갔다고 이러는 거야? 그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냐고? 그래, 그럴 일이었다. “그날 우진이가 마침 나랑 하은이한테 밥을 사 준다고 해서 비행기를 놓친 거잖아. 우진이는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어. 내가 좀 같이 있어 주면 어때? 남자가 왜 그렇게 쪼잔해?” 심우진에게 아는 사람이 없다고? 그럼 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야말로 의지할 가족 하나 없이 혼자였다. 나는 오랫동안 사랑했던 여자를 바라봤지만 이제는 낯설기만 했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쏟아부은 정성이 너무나 아까웠다. 딸 강하은까지 엄마 편을 들었다. 나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빠는 왜 그렇게 속이 좁아요? 아저씨처럼 잘해 주지도 못하잖아요. 이것 보세요. 이거 다 아저씨가 사 준 선물이에요. 아빠는 맨날 엄마 기분만 상하게 하잖아요.” “나 이제 아빠가 싫어요. 차라리 우진 아저씨가 내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내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내 딸이었다.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웠지만 정작 하은이에게는 친아빠인 내가 남보다 못한 존재였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사람 마음이라고 아프지 않을 리 없다. 상처가 거듭되면 결국 마음도 식어 버리는 법이다. 모녀가 그렇게 나를 싫어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그만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송서연 앞에 내려놓았다. “이혼하자.” 그리고 입을 삐죽 내민 하은이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러면 네가 원하던 새 아빠도 생기겠네.” 제2화 내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모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큰소리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강도윤,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원래 당신이 잘못했잖아. 밖에서 하룻밤 반성 좀 하라고 한 게 뭐가 잘못됐는데?” 나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송서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이맘때 북쪽 지방은 벌써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나는 길거리에서 몇 시간이나 폭우를 맞으며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차가운 밖에서 밤새 추위에 떨다가 고열이 나고 폐렴까지 걸렸다. 다행히 이웃이 병원에 데려다줬기에 망정이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더 할 말 없어. 서명해.” 송서연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 그동안 이혼을 입에 올린 건 늘 화가 난 송서연 쪽이었다. 예전에는 항상 그녀가 투덜거리며 이혼을 말했지, 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강도윤, 지금 무슨 짓 하는 건지 알아?” 고열을 앓은 뒤라 아직 몸에 힘이 없었다. 나는 지친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아. 이제는이 껍데기뿐인 결혼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 늘 떠받들리며 보살핌을 받아왔던 송서연은 내가 물러서지 않자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좋아. 이혼하자고 하면 못 할 줄 알아?” 송서연은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더니 내 얼굴에 거칠게 내던졌다. “강도윤, 잘 들어. 당신 같은 남자는 나랑 어울리지도 않아. 돈도 빽도 없는 주제에 나랑 이혼하고 어떻게 사는지 두고 보겠어.” “딸은 절대 못 데려가. 하은이 양육권은 무조건 내 거야. 당신 따라가서 가난하게 살게 둘 순 없으니까.” 그때 강하은이 얼른 송서연 다리를 끌어안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엄마한테는 아저씨처럼 잘생기고 다정한 사람이 어울려요. 아저씨는 피아노도 치고 나한테 다이빙도 가르쳐 주는데, 아빠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요.” “이제 내 아빠 아니니까 우리 집에서 나가세요.” 나를 꼭 닮은 어린 얼굴에서 어떻게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만 같은 말들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예전이었다면 딸의 말에 마음이 무너져 한참을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아이와의 부녀 관계도 여기서 끝이야.’ “걱정하지 마. 양육권을 놓고 다툴 생각 없어.” 나는 강하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이제 내 딸이 아니야. 누구를 아빠로 삼든 네 마음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송서연과 강하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침실에 들어가 짐을 챙겼다. 내 물건은 얼마 없었다. 갈아입을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내 삶의 중심은 송서연과 강하은이였다. 두 사람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가정을 지키려고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정작 두 사람에게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마음을 다하면 진심으로 보답할 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집을 나서기 전, 나는 약지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서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10년 동안 내 손가락에 있던 반지였다. 나를 10년 동안 옭아맨 반지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짐을 들고 나오자 송서연과 강하은은 누군가와 영상 통화 중이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하은이, 오늘도 착하게 있었어? 내일 아저씨가 선물 들고 갈게. 네가 갖고 싶어 하던 곰돌이야.” 심우진이었다. 강하은은 기다렸다는 듯 명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저씨가 최고예요. 내일 봐요.” 송서연도 한없이 다정한 표정이었다. 조금 전 내게 소리 지르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우진아, 하은이한테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 버릇 나빠져.” 집 안에는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그곳에서 불청객은 나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반복되는 상처 끝에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미 소진되었으니까.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나는 이제 정말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아무 미련도 없이 쿨하게 떠났다. 제3화 나는 혼자 결혼 전에 사 두었던 아파트로 돌아가 짐을 풀었다. 내 명의로 된 재산은 많지 않았다. 그 아파트가 그나마 유일하게 값이 나가는 재산이었다. 원래는 이 아파트를 강하은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니까. 그런데 심우진이 던진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달라졌다. “이렇게 낡고 허름한 집에서 하은이가 어떻게 살겠어? 송씨 가문 아가씨 신분에 어울리지도 않아.” 부잣집 생활에 익숙한 강하은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며 아파트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 저런 허름한 집에서 살기 싫단 말이에요. 엄마네 별장에서 살 거예요.” 아이가 떼쓰는 모습을 보자 나는 가슴이 싸늘해졌다. 송서연은 얼른 강하은을 끌어안고 달랬다. “울지 마, 우리 딸. 엄마가 저런 집에 살게 할 리 없잖아.” 그러고는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강도윤, 지금 무슨 생각이야? 내 딸더러 당신 그 허름한 집에서 살라고? 하은이도 당신처럼 평생 찌질하게 살게 만들고 싶어?” 아빠로서의 내 진심이 어쩌다 두 사람에게 그토록 끔찍한 잘못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삼킨 채 명의를 옮기지 않겠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때만 해도 아이가 철이 없어서 한 말이니 어른이 마음에 담아두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강하은이 정말 나를 사랑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짓밟을 수 있었을까? 돌이켜 보면 일에는 시작이 있었지만 내가 너무 늦게 알아챘을 뿐이다. 집안일에서 벗어나자 내게는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쓸 시간이 넉넉히 생겼다. 우선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축구 경기를 시청했다. 그 집에서는 누려 보지 못한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송서연은 매운 음식을 좋아했고 강하은은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었다. 반대로 나는 매운 걸 못 먹었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의 입맛을 맞추느라 정작 내가 뭘 먹고 싶은지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기분을 살피느라 정작 내 마음은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송서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차단할까 망설였지만, 송서연의 성격상 이 전화를 안 받으면 또 걸어올 터였다. 차라리 빨리 끝내는 편이 나았다. “무슨 일이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송서연이 마지못해 물었다. “지난달에 주문 제작한 브로치, 어디 뒀어?” 나는 잠깐 생각한 뒤 대답했다. “드레스룸 서랍장 아래에서 두 번째 칸.” 물건을 찾았는지 송서연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잘난 체하는 말투로 비꼬아 말했다. “집에서 물건이 어디 있는지 당신만 아니까 전화한 거야. 그거 아니었으면 연락도 안 했어.”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송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삐지고 돌아와.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오늘 당신이 없어서 하은이가 가정부가 한 음식이 맛없다면서 밥도 제대로 안 먹었어. 당신 딸이 걱정도 안 돼?” “그리고...” 송서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차갑게 끊었다. “송서연, 오늘 밤 가정부한테 집안 물건들이 어디 있는지 전부 알려 줄게. 앞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 강하은이 어떻게 지내든 내 알 바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이혼하자는 말, 농담 아니었어. 우린 이미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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