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겨울의 이별 이야기

GoodNovel 완결

함께 살려고 마련했던 신혼집 계약을 해지하자 부동산 중개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계약금까지 다 냈잖아요. 예비 신랑분 돌아오시면 같이 서명하시지 그래요?” 나는 웃으며 열쇠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안 기다릴래요. 그 사람은 첫사랑이랑 스키 타러 가야 하거든요.” 연애한 지 5년. 강도현은 해마다 겨울이면 일본에 갔다. 출장이라고 했지만, SNS에 올라오는 건 후지산의 눈 덮인 봉우리뿐이었다. 신혼여행은 언제 가느냐고 물을 때마다 도현은 ‘다음에’라고 했다. 그러다 어제, 집에 두고 간 도현의 낡은 카메라에서 사진 수백 장을 발견했다. 같은 여자, 같은 구도, 같은 배경... 벚꽃과 흰 눈, 그리고 후지산... 내가 강도현과 함께 멀리 나가 본 건 옆 도시로 신혼집을 보러 갔을 때가 전부였다. 그날 강도현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는 그런 겉치레 하지 말고, 착실하게 살자.” 내 손으로 직접 꾸민 신혼집을 바라보다가, 나는 끝내 무너져 소리 내 울고 말았다. 중개인이 조심스럽게 펜을 내밀었다. “그래도 계약 해지하실 건가요?” “네, 해지할게요.” 나는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퇴사 신청도 이미 승인됐다. 오늘이 이 도시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후지산이 내게 올 일은 없지만, 나는 멀리 떠날 수 있었다.

챕터 (1)

第1章

함께 살려고 마련했던 신혼집 계약을 해지하자 부동산 중개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계약금까지 다 냈잖아요. 예비 신랑분 돌아오시면 같이 서명하시지 그래요?” 나는 웃으며 열쇠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안 기다릴래요. 그 사람은 첫사랑이랑 스키 타러 가야 하거든요.” 연애한 지 5년. 강도현은 해마다 겨울이면 일본에 갔다. 출장이라고 했지만, SNS에 올라오는 건 후지산의 눈 덮인 봉우리뿐이었다. 신혼여행은 언제 가느냐고 물을 때마다 도현은 ‘다음에’라고 했다. 그러다 어제, 집에 두고 간 도현의 낡은 카메라에서 사진 수백 장을 발견했다. 같은 여자, 같은 구도, 같은 배경... 벚꽃과 흰 눈, 그리고 후지산... 내가 강도현과 함께 멀리 나가 본 건 옆 도시로 신혼집을 보러 갔을 때가 전부였다. 그날 강도현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는 그런 겉치레 하지 말고, 착실하게 살자.” 내 손으로 직접 꾸민 신혼집을 바라보다가, 나는 끝내 무너져 소리 내 울고 말았다. 중개인이 조심스럽게 펜을 내밀었다. “그래도 계약 해지하실 건가요?” “네, 해지할게요.” 나는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퇴사 신청도 이미 승인됐다. 오늘이 이 도시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후지산이 내게 올 일은 없지만, 나는 멀리 떠날 수 있었다. 제1화 “인아야, 너 정말 계약 해지했어?” 부동산을 나오자마자 도은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응, 했어.” “계약금이 6천만 원이잖아. 너 혼자 해지해도 되는 거야? 강도현은 알아?” “일본에 있어.” “출장 갔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은비가 2초쯤 말을 잃었다. “인아야, 아무리 싸웠어도 집까지 이렇게 하면...” “걔 낡은 카메라에서 사진 수백 장을 찾았어. 같은 여자, 같은 산을 5년 내내 찍었더라.”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유채린이랑 찍은 거야?” 도은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강도현이 사진 한 장을 보내 왔다. 흰 도자기 잔에 담긴 따뜻한 코코아, 잔 옆면에는 작은 사슴이 그려져 있었다. 사진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도쿄에 눈 온다. 추워 죽겠네.] 나는 그 잔을 알아봤다. 지난겨울에도 강도현은 똑같은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보냈다. 어느 가게냐고 묻자 아무 데나 들어갔다며 기억이 안 난다고 했었다. 그런데 낡은 카메라 속에는 다른 사진이 있었다. 같은 가게에 앉은 유채린이 똑같은 코코아를 옆에 두고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내가 본 적 없는 와인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5년 동안 해마다 겨울이면 같은 가게에서 같은 코코아를 마시고 같은 사람을 찍었다. 하지만 내게 보낸 건 언제나 음식과 풍경 사진뿐이었다.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아파트에 도착해 신발을 갈아 신다가 무심코 신발장을 내려다봤다. 강도현의 운동화 옆에 흰색 캔버스화 한 켤레가 더 있었다. 사이즈는 35, 내 신발은 37 사이즈였다. 허리를 숙여 깔창을 들춰 보니 안에 메모지가 끼워져 있었다. [현아, 지난번 신발은 발이 아팠어.] ‘현아...’ 5년이나 사귀면서도 도현에게 그런 애칭이 있다는 걸 몰랐다. 강도현은 나한테 그런 이름으로 부르게 한 적이 없었다. 신발을 제자리에 놓고 침실로 들어갔다. 강도현의 노트북 화면에는 여행 사이트 예약 내역이 떠 있었다. 홋카이도, 2월 14일 출발. 개인탕과 가이세키 요리가 포함된 2인 온천 패키지였다. 요청 사항도 적혀 있었다. [채린이 생일.] 내 생일은 3월 9일. 유채린의 생일은 2월 15일이었다. 지난해 3월 9일, 저녁에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강도현은 회사 회식이 있다고 했다. 밤 11시까지 기다린 끝에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이제 집이야. 자? 생일 축하해. 다음에 챙겨 줄게.” 다음에. 그 말은 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었다. 나는 강도현의 휴대전화에 연결된 클라우드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은 3천 장이 넘었다. 내 사진은 11장, 그중 7장은 연애 첫해에 찍은 것이었다. 그다음 4년 동안 찍힌 건 고작 4장이었다. [도쿄의 눈]이라는 폴더를 열자 온통 유채린 사진뿐이었다. 기모노를 입은 모습, 눈밭을 걷는 모습, 일본 신사 앞에서 두 손을 모은 모습... 구도도 조명도 정성스러워서 잡지 화보처럼 보였다. 반면 내 사진은 늘 대충 찍었다. 각도도, 빛도 살피지 않았다. “나도 좀 예쁘게 찍어 주면 안 돼?” 내가 투정 부리면 강도현은 늘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화보 찍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됐지.” ‘이 정도면 됐지.’ 강도현이 내게 가장 자주 하던 말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도현이 영상 통화를 요청해왔다. 전화를 받았다. 화면 속 도현은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뒤로는 호텔 복도가 보였다. “밥 먹었어?” “응.” “나 모레 돌아가. 오후 3시 비행기로.” “알았어.” “목소리가 왜 그래?” “좀 피곤해서.” “일찍 자.” 강도현이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현아, 차 왔어.” 강도현은 고개를 돌려 대답하더니 다시 나를 봤다. “채린이가 불러. 이만 끊을게.” “채린이가 왜 네 호텔에 있어?” “옆방에 묵어. 같이 밥 먹으러 나가려고.” “해마다 같이 가는 거야?” “그냥 일정이 겹친 거야.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강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을 설명한다는 듯했다. “아, 맞다. 너 줄 마그넷 샀어. 이번엔 한참 골랐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문에는 후지산 모양 마그넷이 5개가 붙어 있었다. 크기도, 구매한 해도 제각각이었다. 제2화 5년 동안 강도현에게 일본에서 받은 기념품 전부였다. 유채린은 온천 호텔과 기모노 체험, 생일 이벤트에다 자신만 부를 수 있는 애칭까지 받았는데 말이다. 다시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강도현이 사진을 한 장 더 보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사슴 모양 마그넷이었다. [예쁘지? 채린이가 골라 줬어.] 내 선물을 고르는 데까지 유채린이 끼어 있었다. 나는 메시지를 적었다. [유채린한테는 뭘 사 줬는데?] 전송 버튼 앞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결국 글자를 하나씩 지우고, 대신 짧게 답했다. [응.] 강도현이 돌아왔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온 도현은 옆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네 마그넷.” 그러더니 다른 주머니에서는 큰 봉투를 꺼내 현관에 내려놓았다. “그건 뭐야?” “채린이 거. 목도리 하나 부탁하더라고. 도쿄 쪽 무늬가 예쁘대.” 봉투 입구로 짙은 붉은색 캐시미어 목도리 끝이 보였다. 살짝 만져 보니 아주 부드러웠다. 지난겨울 나도 캐시미어 목도리를 갖고 싶다고 했었다. “목도리를 뭐 하러 또 사? 옷장에 몇 개 있잖아.” 강도현은 분명 그렇게 대답했다. 옷장에 있던 목도리는 전부 내 돈으로 산 것이었다. “네가 채린이 목도리를 사다 줬어?” “부탁하길래. 가는 김에 산 거지.” ‘같이 갔는데 부탁은...’ 강도현은 신발을 갈아 신고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 피곤해. 비행기를 오래 탔더니.” “나랑은 언제 일본 갈 거야?” 강도현이 잠깐 멈칫했다. “갑자기 그건 왜?” “갑자기 아니야. 5년째 물어보고 있잖아.” “이번에 바쁜 것만 끝나면 가자. 다음에.” ‘다음에...’ 벌써 열일곱 번째 ‘다음에’였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전, 강도현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아야, 도현이 돌아왔지? 결혼식 준비 서둘러야 해. 청첩장 언제 나오느냐고 다들 물어보네.” “준비하고 있어요.” “채린이가 지난주에 와서 하객들한테 나눠 줄 결혼식 답례품을 네 가지나 골라 줬어. 한번 봐 줄래?” 젓가락을 쥔 손이 멈췄다. “유채린이 골라 줬다고요?” “그럼. 네가 바쁘다니까 자기가 돕겠다고 왔지 뭐니. 얼마나 기특해.” 나는 강도현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전화만 보고 있었다. “어머님, 그런 건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유채린한테까지 부탁하실 필요 없어요.” “뭐가 부탁이니. 원래 자주 와. 한 달에 서너 번은 오니까 너보다 훨씬 자주 보지.” 연애 2년 차에 내가 매주 어머님을 찾아뵙자고 한 적이 있었다. 강도현은 엄마가 사람 북적이는 거 안 좋아한다며 너무 자주 갈 필요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만 갔다. 그런데 나중에는 내가 바쁘니 두 달에 한 번만 가도 된다고 했다. 어머님이 사람들이 오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오는 걸 싫어하는 거였다. 유채린은 한 달에 서너 번씩 가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어머님, 답례품은 제가 준비할게요.” “그래. 그래도 채린이가 고른 게 괜찮으니까 참고는 해 봐.” 전화를 끊고 도현에게 물었다. “네가 유채린한테 어머님 댁에 가서 답례품 고르는 걸 도와 달라고 했어?” “걔가 알아서 간 거야.” “알고 있었으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그걸 굳이 말해야 해? 그냥 좀 도와준 건데.” “우리 결혼식인데 왜 유채린이 도와줘야 하냐고.” 강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넌 매일 야근하니까 시간 없는 줄 알았지.” “나한테 물어보기는 했어?” “알았어, 알았어. 앞으론 네가 다 해. 됐지?” 벌써 짜증 섞인 말투였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걸 굳이 말해야 해?” “알았어. 네 말이 다 맞아.” ... 그러고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또 울렸다. 강도현의 어머니가 사진을 보내셨다. 유채린이 어머님 댁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 접시를 든 채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채린이가 만든 제육볶음이야. 내가 한 거랑 똑같아.] 유채린은 그 주방에서 나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그릇이 어디 있는지, 양념은 어느 칸에 있는지, 어머님이 뭘 좋아하시는지까지 알았다. 나는 5년을 드나들었으면서도 갈 때마다 물어봐야 했다. 자주 가지 못했으니까. 도현이 그렇게 자주 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휴대전화에 어머님의 메시지가 한 통 더 도착했다. 제3화 [인아야, 내가 솔직히 말할게. 채린이는 어릴 때부터 봐 온 애라 도현이랑 서로 속속들이 알아. 너도 좋은 아이긴 한데 남 챙기는 건 좀 서툴잖니. 채린이한테 좀 배워 봐.] 나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때 강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 밥 안 먹어?” “배 안 고파.” 도현이 잠옷을 꺼내러 옷장 앞으로 갔을 때, 정장 안주머니에서 예쁜 벨벳 상자가 삐져나온 게 보였다. “그건 뭐야?” “아, 이거? 채린이 생일 선물. 목걸이야.” 강도현은 상자를 열어 보여 줬다. 가느다란 은색 체인에 벚꽃 모양 펜던트가 달려 있었고, 꽃잎 가운데에는 알파벳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K. 강도현의 이름을 나타내는 이니셜이었다. “맞춤 제작한 거야. 두 달이나 기다렸어.” 우리 약혼반지는 강도현이 인터넷에서 주문한 것이었다. 택배가 오자 포장을 뜯어내 손가락에 바로 끼워 줬다. 매장에 가서 직접 고르고 싶다고 했더니, 반지가 다 거기서 거기라 굳이 갈 필요 없다고 했다. “유채린 목걸이는 맞춤 제작까지 했어?” “생일이잖아. 그냥 성의 표시지.” “내 생일에는 뭘 줬는데?” 강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작년에... 돈 보내 줬던 것 같은데?” “안 보냈어.” “그럼 깜빡했나 보네. 다음에 챙겨 줄게.” ‘다음에... 끝도 없는 다음에...’ “강도현, 유채린한테는 맞춤 목걸이를 주면서 나한테는 마그넷을 줬잖아. 걔 생일은 챙기고 내 생일은 잊었고. 걔는 어머님 댁에 드나들게 하면서 난 갈 기회조차 안 줬어.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강도현은 상자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네. 채린이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야. 친구한테 좀 잘해 주는 게 뭐가 문제야?” “그럼 나한테는?” “내가 너한테 못 해줬어? 5년이나 사귀고 신혼집도 사고 결혼까지 준비하는데, 그걸로 부족해?” 강도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인아야, 우린 그런 겉치레 안 하기로 했잖아. 착실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해.” ‘겉치레하지 말자고? 온천 호텔도, 맞춤 목걸이도, 생일 이벤트도 다 겉치레 아닌가? 그런 겉치레는 전부 유채린에게 해 줬으면서...’ 내게 남긴 건 ‘착실하게 살자’는 말뿐이었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불을 끄고 강도현에게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우리 착실하게 살자.” 다음 날, 강도현의 대학 동기 조현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서인아 씨, 토요일에 모임 있는데 올래요?” “무슨 모임인데요?” “옛날 동기들끼리 얼굴이나 보려고요. 채린이도 와요.” ‘유채린도 온다고? 당연하겠지.’ 토요일 저녁, 우리가 도착했을 때 유채린은 이미 모임 장소의 룸에 앉아 있었다. 흰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목에는 그 벚꽃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K자가 새겨진 펜던트가 조명 아래서 반짝였다. “현아!” 유채린이 강도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목소리는 달콤하다 못해 느끼할 정도였다. 강도현은 유채린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뒤따라 들어가 강도현의 반대편에 앉았다. “형수님 오셨네요?” 조현우가 인사했다. “형수님이라고 부르지 마.” 유채린이 웃으며 정정했다. “아직 결혼 안 했잖아.” 조현우가 강도현에게 물었다. “결혼 날짜 잡았어?” “아직 날짜 보고 있어.” “채린이가 결혼 준비 많이 도와준다며? 너희 어머니가 걔는 맨날 집에 온다고 하시던데.” 유채린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잔을 저었다. “난 그냥 조금 거드는 거야. 인아 씨가 워낙 바쁘시잖아.” 유채린은 누구보다 살갑게 나를 ‘인아 씨’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목에는 내 약혼자가 맞춰 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채린아, 목걸이 예쁘다. 누가 사 줬어?” 한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목걸이를 들여다봤다. 유채린은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강도현을 한번 흘끗 봤다. “친구가 선물해 줬어.” “어떤 친구가 이렇게 통이 커? 맞춤 제작한 거지?” “내가 줬어.” 강도현이 말을 받았다. “생일이라 그냥 하나 산 거야.” 제작에 두 달이나 걸린 목걸이를 ‘그냥 산 거’라고 했다. 그 여자가 나와 강도현을 번갈아 봤다. “그럼 약혼녀한테도 사 줬겠네?” “인아는 이런 거 잘 안 해.”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한 번도 사 준 적이 없으니 내가 싫어한다고 지레짐작했을 뿐이었다. “인아 씨, 괜찮죠?” 유채린이 나를 봤다. “네, 괜찮아요.” “인아 씨는 마음도 넓네요.” 제4화 한창 식사를 하던 중, 조현우가 분위기를 띄웠다. “자자, 서로 얼마나 잘 아는지 시험해 보자. 강도현, 네 와이프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강도현이 잠깐 생각했다. “장미?” “땡. 도라지꽃.” “생일은?” “3월... 9일?” 정답을 맞히는 데도 잠깐 망설였다. “제일 무서워하는 건?” “얘는 무서워하는 거 없어.” 강도현이 웃었다. “인아는 겁이 없거든.” 나는 어둠을 무서워했다. 연애 첫해에 강도현에게 분명 말했었는데 잊어버린 모양이다. 조현우가 또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러면 안 되지. 자, 채린아, 이번엔 내가 너한테 물을게. 강도현이 제일 좋아하는 커피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설탕 조금 넣은 거로.” “제일 무서워하는 건?” “천둥. 어릴 때 집 마당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서 울었잖아.” “말버릇은?” “‘이 정도면 됐지.’”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현우가 탁자를 치며 말했다. “채린이가 형수님보다 강도현을 더 잘 아네.” “10년이나 알았으니까.” 채린이가 웃었다. 10년... 유채린은 강도현을 10년 알았고, 나는 5년 알았다. 유채린은 강도현이 천둥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다. 강도현이 내게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나와 있을 땐 뭘 물어도 ‘아무거나’, ‘다 좋아’, ‘별 얘기 없어’라고만 했다. 유채린과 있을 때는 신나서 떠들어 댔다.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모임이 끝나 갈 무렵, 나는 화장실에 갔다. 유채린도 따라 들어왔다. “인아 씨.” 채린이는 세면대에 기대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덧발랐다. “내가 한마디 해도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현이가 좀 무심하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니에요. 너무 따지지 말아요.” “안 따졌어요.” “현이가 그러는데, 요즘 인아 씨 기분이 안 좋고 내 문제로 자꾸 삐친다면서요?” 강도현은 우리 사이의 문제를 유채린이에게 말해 버렸다. “인아 씨, 싫은 소리 하나 할게요. 그 정도로도 못 믿어 주면 결혼해 봐야 재미없어요.” “강도현이 해마다 채린 씨랑 일본에 가는데, 내가 뭘 믿어야 하죠?” 유채린이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인아 씨, 그건 출장이라니까요.” “출장이라면 매년 같은 곳에 가고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같은 사람만 찍지는 않죠.” 유채린은 웃는 얼굴 그대로 눈빛만 싸늘해졌다. “인아 씨, 나랑 현이는 친구예요. 굳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인아 씨 문제예요.” 유채린은 가방을 들고 문으로 가다가 잠깐 멈췄다. “아, 그리고 신혼집 거실 벽은 따뜻한 회색으로 바꾸는 게 좋겠어요. 인아 씨가 고른 크림색보다 예쁘다고 현이도 그러더라고요.” 문이 닫혔다. 신혼집 거실 벽... 내가 크림색을 골라서 작업자가 두 번 칠하는 걸 직접 지켜본 벽이었다. 강도현은 단 한 번도 공사 현장에 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유채린의 의견은 듣고, 내 선택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강도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가자. 채린이 집에 데려다주게.” “혼자 못 가?” “가는 길이잖아.” 유채린의 집은 도시 동쪽, 우리 집은 서쪽인데 어느 부분이 가는 길이라는 걸까. “네가 데려다줘. 난 택시 탈게.” “왜 이래. 같이 가자.” 차에서는 유채린이 조수석, 내가 뒷좌석에 앉았다. 유채린은 라디오를 일본어 방송으로 바꿨다. “현아, 이 노래 기억나? 작년에 도쿄 이자카야에서 나오던 거.” “기억나지. 네가 따라 불렀잖아.”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뒷좌석에 앉은 나는 괜히 끼어든 사람 같았다. 집 앞에 도착하자 유채린은 차에서 내려 허리를 숙이고 나를 들여다봤다. “인아 씨, 푹 쉬세요.” 그러고는 도현을 돌아봤다. “현아, 다음 주 그 일 잊지 마.” “알았어.” 채린이는 문을 닫고 떠났다. 나는 뒷좌석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옮겨 앉았다. “무슨 일?” “채린이 장롱 하나 옮겨 주기로 했어.” “이삿짐센터 부르면 되잖아.” “쓸데없이 돈을 왜 써.” 작년에 책 한 상자만 옮겨 달랬을 때는 허리가 아프다며 이삿짐센터를 부르라고 했으면서, 유채린의 장롱은 직접 옮겨 준단다. “강도현, 너 유채린한테 나보다 더 잘해 주는 것 같지 않아?”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라 잘해 주는 게 습관이 됐어. 그래도 내가 결혼하려는 사람은 너잖아. 그걸로 안 돼?” 제5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돼.” 토요일 아침, 부엌에서 죽을 끓였다. “강도현, 오늘은 나가지 말면 안 돼?” 흰 쌀죽에 멸치볶음, 계란말이 한 접시, 강도현이 좋아하는 아침상이었다. “오늘 하루는 나랑 같이 있어 줬으면 해서.” 강도현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뭐. 마침 약속도 없어.” 강도현은 웃으며 앉아 죽을 먹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그의 얼굴을 눈에 담으려 했다. “강도현, 나 사랑해?” 멸치볶음을 집던 강도현의 젓가락이 멈췄다. “그건 왜 갑자기 물어?” “한 번만 네 입으로 듣고 싶어.” “너랑 결혼할 건데, 당연한 거 아니야?” “결혼이랑 사랑은 다른 거잖아.” “너 오늘 왜 그래?” “그냥 네가 직접 말해 줬으면 좋겠어.” 강도현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서인아, 난 당연히...”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도현이 화면을 내려다봤다. “채린이야.” “받지 마.” “잠깐만 볼게.” 강도현은 메시지를 열었다. “채린이네 수도관이 터졌대. 집에 물바람 났대.” “수리 기사 부르면 되잖아.” “기사 올 때까지 한두 시간은 걸릴 텐데, 그동안 집 다 잠기겠다.” 강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좀 보고 올게. 금방 돌아올게.” “강도현, 오늘 안 나가기로 나랑 약속했잖아.” “알아. 그래도 급한 일이잖아. 수도관이 터졌다는데 모른 척할 순 없지.” “그럼 나는?” “넌 왜? 멀쩡하잖아.” 강도현은 내가 늘 괜찮다고 생각했다. 유채린네 수도관이 터진 건 급한 일이지만, 내 마음이 무너진 건 아니었다. 연애 첫해, 강도현은 고백하면서 말했다. “서인아, 너랑 평생 함께하고 싶어.” 그날 도현은 나를 데리고 국수 먹으러 갔다. 앞으로 해마다 기념일이면 이 집에 오자고 했다. 2년 차 기념일에는 잊어버렸다. 3년 차에는 내가 알려 주었다. “국수 한 그릇 먹는 건데, 다음에 가도 되잖아.” 강도현은 그랬다. 4년 차와 5년 차에는 나도 더는 얘기하지 않았고, 강도현도 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다. “딱 한 시간만. 다녀와서 같이 있을게.” 강도현은 겉옷을 입고 공구함을 챙겨 문 앞에 섰다가 돌아봤다. “화내지 마.” 3시간이 지나 전화를 걸었다. “거의 다 됐어. 수도관은 고쳤는데 바닥에 물이 흥건해서 닦아 주고 있어.” “언제 와?” “곧.”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 강도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채린이가 네가 나 보내 줘서 고맙대. 점심 산다니까 먹고 바로 갈게.] 나는 답하지 않았다. 다시 메시지가 왔다. [너 먼저 먹어. 기다리지 말고.] 나는 거실에 앉아 식탁 위에서 차갑게 식어 버린 죽을 바라봤다. 멸치볶음도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가, 옷장을 열고 캐리어 두 개를 꺼냈다. 이 집에 있는 내 물건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옷은 한 가방, 책과 잡동사니는 다른 가방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세면대에 놓인 내 물건이라고는 칫솔 하나와 세안제 한 병뿐이었다. 오히려 유채린의 물건이 더 많았다. 캔버스화, 외투 한 벌, 머그잔, 립스틱 하나까지... 나는 약혼반지를 빼내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옆에 마그넷 5개를 나란히 놓고, 쪽지도 한 장 남겼다. [강도현, 신혼집 계약은 해지했어. 반지 돌려줄게. 마그넷 5개도. 신혼여행은 다른 사람이랑 가.] 캐리어를 끌고 현관으로 나오며 마지막으로 집 안을 돌아봤다. 탁자에는 유채린이 차를 마실 때 쓰는 컵 받침이, 냉장고에는 유채린이 좋아하는 딸기 요구르트가, 신발장 위에는 유채린의 캔버스화가 있었다. 집 안 곳곳에 강도현과 유채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반면 내 흔적은 캐리어 두 개에 전부 담겼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잠그지는 않았다. 아래층에는 호출한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가 짐을 실어 주었다. “어디로 가세요?” “고속철도역이요.” 차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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