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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결합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남편 고윤재와 재결합한 지 3년째 되던 해, 이수연은 별생각 없이 참석한 동문 모임에서 남편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됐다. 그 비밀을 털어놓은 사람은 학창 시절 퀸카로 유명했던 정지안이었다. 누군가 살면서 가장 짜릿했던 일이 뭐냐고 묻자, 술기운이 오른 정지안은 손에 든 잔을 가볍게 흔들며 도발하듯 입을 열었다. “음... 윤재 선배의 숨겨진 애인으로 지내온 거? 더 짜릿한 건 선배 와이프는 우리가 헤어진 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거야.” 정지안은 거리낌없이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우리 사이엔 아이도 있어. 난 지금도 선배가 사 준 한정판 슈퍼카를 몰고, 선배가 주는 생활비로 살고 있어. 선배가 마련해 준 별장에는 도우미들까지 따로 있고...” 폭탄이나 다름없는 고백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수연에게 쏠렸다. 이수연이 바로 고윤재의 아내였으니까. 사람들은 이수연이 충격에 빠져 울음을 터뜨리거나 당장 정지안에게 따져 묻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수연은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자리를 지켰다. 마침 웨이터가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이수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챕터 (1)
第1章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남편 고윤재와 재결합한 지 3년째 되던 해, 이수연은 별생각 없이 참석한 동문 모임에서 남편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됐다.
그 비밀을 털어놓은 사람은 학창 시절 퀸카로 유명했던 정지안이었다.
누군가 살면서 가장 짜릿했던 일이 뭐냐고 묻자, 술기운이 오른 정지안은 손에 든 잔을 가볍게 흔들며 도발하듯 입을 열었다.
“음... 윤재 선배의 숨겨진 애인으로 지내온 거? 더 짜릿한 건 선배 와이프는 우리가 헤어진 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거야.”
정지안은 거리낌없이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우리 사이엔 아이도 있어. 난 지금도 선배가 사 준 한정판 슈퍼카를 몰고, 선배가 주는 생활비로 살고 있어. 선배가 마련해 준 별장에는 도우미들까지 따로 있고...”
폭탄이나 다름없는 고백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수연에게 쏠렸다.
이수연이 바로 고윤재의 아내였으니까.
사람들은 이수연이 충격에 빠져 울음을 터뜨리거나 당장 정지안에게 따져 묻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수연은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자리를 지켰다.
마침 웨이터가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이수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제1화
동문 모임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 이수연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건 SNS였다.
이수연은 고윤재와 함께 찍은 사진부터 그동안 올렸던 게시물까지, 고윤재와 관련된 흔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웠다.
고윤재가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늘 불을 켜 둔 채 기다리던 습관도 며칠 만에 사라졌다.
그러더니 얼마 뒤에는 그토록 오랫동안 매달려 왔던 시험관 시술마저 중단했다.
이수연이 아이를 갖기 위해 얼마나 애써 왔는지는 주변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5년 전, 이수연은 고윤재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량이 충돌하는 순간, 이수연은 본능적으로 고윤재를 감싸안고 모든 충격을 받아 냈다.
덕분에 고윤재는 거의 다치지 않았지만, 이수연은 크게 다쳐 사흘 밤낮을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뒤에는 앞으로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이수연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고씨 가문 어르신들의 바람을 외면하지 못했다.
고씨 가문에 아이를 안겨 주겠다는 마음 하나로 매달 병원을 찾았고, 두꺼운 주삿바늘을 견디며 하루하루 아이가 생기기만을 바랐다.
그렇게까지 간절했던 아이였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미련 없이 놓아 버렸다.
시험관 시술을 중단한 뒤로는 고씨 가문의 크고 작은 일에서도 하나둘 손을 뗐다.
본가를 찾아 집안 어른들의 안부를 챙기는 일도 그만뒀고, 고윤재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도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치 고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기라도 한 사람처럼 일에만 몰두했다.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날이 이어졌다.
그런 변화가 하나둘 쌓이고 나서야 고윤재도 마침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날도 하던 일을 모두 마친 고윤재는 이수연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고윤재에게서는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여유와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수연아...”
문 앞에 선 고윤재가 다정하게 이수연을 불렀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이수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야?”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예전 같았으면 고윤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돌려 반갑게 맞았을 것이다.
재킷을 벗겨 주고 차갑게 식은 두 손을 감싸 쥔 채 입김까지 불어 가며 따뜻하게 녹여 줬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수연은 고윤재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사소한 차이가 고윤재에게는 이상하리만큼 크게 느껴졌다.
고윤재는 문 앞에 선 채 이수연의 표정을 살피려 했다. 하지만 이수연이 살짝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져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먼저 들어가. 아직 한참 더 해야 해.”
말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차분했다.
그런데도 고윤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며칠 전 동문 모임이 있던 날, 고윤재는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정지안이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고윤재는 이수연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혹시 그날 일 때문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지안이가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한 것뿐이라고 설명하면 돼.’
고윤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수연아, 그날 일은 전해 들었어. 지안이가 술에 취해서 헛소리한 거야. 나랑 지안이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창을 도와주고 있었을 뿐이야. 지안이가 가진 돈이 하나도 없으니까...”
“맞아. 우리는 동문이잖아. 게다가 당신은 이제 성공한 기업가니까 평판을 생각해서라도 주변 사람들을 두루 챙길 필요가 있지. 나라도 당신처럼 도와줬을 거야.”
이수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정지안 SNS를 보니까 오늘 생일이던데. 생일 축하하러 안 가?”
예상보다 지나치게 담담한 반응에 고윤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수연아, 나한테 화나서 이러는 거야? 오늘 너랑 같이 집에 가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하지만 이수연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생일은 일 년에 한 번뿐이잖아. 안 갔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다녀와.”
고윤재의 목소리에 조금씩 짜증이 묻어났다.
“나는 며칠째 너랑 집에서 밥 한 끼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얘기도 제대로 못 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윤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지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 실수로 생일 케이크를 떨어뜨렸어. 올 때 케이크 하나만 사다 주면 안 돼? 케이크가 없으면 생일이 너무 허전할 것 같아...”
고윤재는 귀찮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문 앞까지 간 고윤재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이수연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작업을 이어 가고 있었다. 손끝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고윤재는 그런 이수연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수연아, 집에 가서 좀 기다려. 꿀물도 한 잔 준비해 주고. 애들이 오늘 같은 날 그냥 보내 줄 리 없으니까. 분명 술을 잔뜩 먹일 거야. 알았지?”
잠시 뜸을 들이던 고윤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얼마 전에 경매에서 삼신할머니를 본떠 만든 옥패를 하나 낙찰받았어. 좋은 기운을 가져다준다고 하더라. 우리한테도 분명 예쁜 아이가 찾아올 거야.”
이수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윤재는 문을 닫고 떠났다.
문이 닫히자, 작업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한쪽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수연의 조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고 대표님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요? 언니가 예전에 고 대표님 구하려다가 이렇게 된 걸 뻔히 알면서... 다른 여자 생일 챙기러 가면서 어떻게 언니한테 아이 이야기를 해요?”
“괜찮아.”
이수연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눈앞의 스케치 용지는 이미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몇 번이고 떨어진 눈물에 애써 그려 놓은 선마저 번져 엉망으로 뭉개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수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휴대폰을 들었다.
작성해 두었던 이메일의 마지막 문장을 마저 입력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제 해외 디자인 스튜디오에 합류해 주신다니 정말 환영해요. 오래 기다렸어요.]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제야 이수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7일만 버티면 됐다.
7일 뒤면 이수연은 이곳을 완전히 떠나 고윤재도, 정지안도, 두 사람과 얽힌 지난 시간도 모두 뒤로한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제2화
이수연과 고윤재가 서로를 알고 지낸 지는 어느덧 30년 가까이 됐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집안끼리 왕래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학창 시절에는 같은 학교 선후배로 지냈다.
어린 시절의 고윤재는 밥을 먹기 싫다고 떼쓰는 이수연을 달래 가며 한 숟갈씩 떠먹여 주던 다정한 옆집 오빠였다.
학교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학생 때는 이수연을 괴롭히던 아이들을 혼내줬고 대학생이 된 뒤에는 캠퍼스 반대편까지 찾아와 패션디자인을 전공하는 이수연의 피팅 모델을 자처하기도 했다.
고윤재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수연을 아끼고 챙겼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한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양가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혼사라며 기뻐했다.
이수연 역시 의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아껴 준 고윤재와 함께라면 결혼 생활도 별다른 굴곡 없이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그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교통사고 당시, 이수연은 고윤재를 보호하려다 크게 다쳤고 그 후유증으로 임신하기 어려운 몸이 됐다.
고윤재는 자신 때문에 이수연이 그렇게 됐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동안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고윤재는 우연히 이수연의 대학 동기였던 정지안을 다시 만났다.
당시 정지안은 가진 돈 한 푼 없이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정지안은 고윤재의 고민을 들어 주며 곁에서 위로해 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처음에 고윤재가 정지안에게 품었던 건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가끔 작은 선물을 건네고,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아파트를 구해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그 선을 넘고야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수연은 고씨 가문의 별장에서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함께 있는 고윤재와 정지안을 목격했다.
순간 이수연은 눈이 뒤집혔다. 정지안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움켜쥐었고, 두 사람은 한바탕 몸싸움을 벌였다.
정지안은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윤재의 뒤에 몸을 숨겼다.
“수연아, 오해야. 난 잠깐 별장에 머물게 된 것뿐이야. 선배가 새 일자리를 알아봐 줬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 찾아온 거야.”
이수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뭘 물어보려고 옷까지 벗은 건데?”
당시 혈기 왕성했던 고윤재는 이수연이 지나치게 몰아붙인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격해진 두 사람은 크게 다퉜고, 결국 화를 참지 못한 고윤재는 홧김에 이혼 관련 서류에 서명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하지만 이수연이 떠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먼저 견디지 못한 건 고윤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수연을 향한 그리움은 오히려 짙어졌고, 결국 고윤재는 미친 듯이 이수연을 찾아다니며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매달렸다.
정지안과는 완전히 끝냈다고 했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어떤 관계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이수연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면 모를까. 아니면 절대 용서 안 해.”
그런데 고윤재는 정말로 이수연에게 별을 선물했다.
당시 일곱 천체가 한 줄로 늘어서는 보기 드문 천문 현상이 나타나자, 고윤재는 그 일곱 별의 명명권을 사들여 ‘수연 별자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윤재는 영원을 상징하는 우주처럼 두 사람의 사랑도 영원히 이어질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혼인신고를 했다. 그날 고윤재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이수연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반면 이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인관계증명서에 나란히 적힌 두 사람의 이름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이수연이 고윤재에게 돌아간 건 오랜 세월 이어진 관계를 완전히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고씨 가문의 배경과 고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지위는 이수연이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나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됐다.
하지만 재결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지안이 다시 나타났다.
정지안은 아랫배를 감싸안은 채 이수연에게 애원했다.
“수연아, 나 선배 아이를 가졌어. 제발 아이만은 낳게 해 주면 안 될까...”
고윤재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차마 이수연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연아, 나 정말 지안이랑 끝냈어. 이 아이는 아마 그전에 생긴 것 같아...”
잠시 머뭇거리던 고윤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고씨 가문도 대를 이어야 하잖아. 우리 가문을 이어받을 아이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
이수연은 말없이 고윤재를 바라봤다.
평생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그 순간만큼은 한없이 낯설고 우스워 보였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고윤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대답하는 대신 몸을 돌려 정지안을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그날 밤, 이수연은 눈에 보이는 물건을 모조리 깨부쉈다.
이수연은 자신이 비참하게 무너진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씨 가문 저택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객실로 숨어들어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듣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고윤재가 집으로 돌아온 건 날이 밝고 나서였다.
고윤재가 이수연을 발견했을 때, 두 손은 깨진 물건에 베여 피투성이였고 다리에도 핏자국이 가득했다.
“수연아!”
고윤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다급히 이수연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수연은 고윤재를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차갑게 굳은 눈으로 고윤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정지안, 둘 중 하나만 선택해.”
고윤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안이가 아이를 지우기로 했어. 이제 정말 지안이랑 완전히 끝이야.”
그 말을 들은 뒤에야 이수연은 더 이상 울지도,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래도 오빠가 선택한 사람은 나니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더 망가져만 갔다.
정지안이 유산 후 몸조리를 하는 동안 고윤재는 보양식과 선물을 하루가 멀다고 보냈다. 그 뒤로도 마치 보상이라도 하듯 해마다 정지안의 생일을 챙겼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이수연은 화를 냈고 수도 없이 고윤재와 싸웠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고윤재의 행동은 평범한 동문 선후배 사이에서 허용될 선을 이미 한참 넘어섰으니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고윤재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했잖아. 난 내 아이까지 포기했어! 나랑 지안이는 정말 완전히 끝났다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수연을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래도 지안이는 내 아이를 가졌던 사람이야. 기본적인 걱정조차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러고는 마지막에 꼭 한마디를 덧붙였다.
“수연아, 너 원래 이렇게까지 모질고 독한 사람 아니었잖아.”
‘내가 모질고 독하다고? 바람난 남편을 의심하고, 결혼 생활에 끼어든 남편의 내연녀를 용납하지 못한 게 모질고 독하다는 말까지 들어야 할 일이야?’
이수연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같은 문제로 몇 번이고 다투기를 반복하면서 이수연도 점점 지쳐 갔다.
그래도 더 나빠질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적어도 동문 모임에서 정지안이 술김에 모든 진실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그날 정지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감춰 왔던 마지막 진실까지 모조리 드러냈다.
고윤재와 정지안의 관계는 단 한 번도 끝난 적이 없었다.
고윤재가 이수연에게 숨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그때 지웠다고 했던 아이까지 몰래 낳아 키우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수연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완전히 무너졌다.
이수연은 더 이상 고윤재를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기로 했다.
제3화
이수연은 작업실을 나서기 전 이혼 관련 서류를 출력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예상대로 고윤재는 정지안을 만나러 간 모양이었다. 넓은 집 안은 썰렁할 만큼 조용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고윤재가 경매에서 낙찰받았다는 삼신할머니를 본떠 만든 옥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집사 차주원이 웃으며 이수연을 맞았다.
“대표님께서 참 마음을 많이 쓰셨네요. 사모님께서 아이를 기다리시는 걸 아시고, 이렇게 뜻깊은 물건을 선물하셨나 봅니다. 어디에 두고 싶으세요?”
예전 같았으면 이수연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고윤재에게는 이미 정지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었으니까.
‘나한테는 아이를 갖자면서 이런 것까지 선물하고, 가증스럽게 뒤에서는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를 몰래 키우고 있었다니... 대체 언제까지 속일 생각일까.’
아이를 점지해 달라는 의미가 담긴 옥패를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수연은 무심코 휴대폰을 확인했다.
공교롭게도 SNS 피드 가장 위에 정지안이 올린 게시물이 떠 있었다. 고윤재와 함께 찍은 생일 기념사진이었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뒤로는 늘 점잖은 모습을 유지하며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던 고윤재가 정지안의 카메라 앞에서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품에는 아이가 안겨 있었다.
누가 봐도 어린 시절의 고윤재를 빼닮은 얼굴이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사진 속 생일 케이크도 평범하지 않았다.
고씨 가문 계열사에서 운영하는 디저트 브랜드에서 특별히 제작한 케이크였다.
동문 모임에서 정지안이 자신은 ‘고씨 가문 사모님’이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했던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후배로 보이는 동문 한 명이 축하 댓글까지 남겨 놓았다.
[고 대표님이랑 사모님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세 식구 너무 행복해 보여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은 황급히 삭제됐다.
아마 사진 속 여자가 고윤재의 진짜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수연은 그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봤다.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이혼 관련 서류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결혼한 뒤, 이수연도 두 사람의 일상을 기록하는 걸 좋아했다.
기념일이나 특별한 날이면 고윤재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고,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축복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고윤재는 사업가로서 자신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함께 찍은 사진을 더는 올리지 못하게 했다.
이수연은 그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저 고윤재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지안과 찍은 사진은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아내인 이수연과 찍은 일상 사진은 세상에 보여 주기 싫다던 남자가 정지안과 아이를 품에 안고 찍은 사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했다.
이수연은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정지안이 댓글에 일일이 답하는 대신 짧은 글 하나를 남겼다.
[다들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댓글은 전부 잘 봤어요. 시간이 늦어서 저희는 이제 먼저 자러 갈게요.]
‘저희?’
이수연의 시선이 그 두 글자에 오래 머물렀다.
이내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윤재가 부탁했던 꿀물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 밤 고윤재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다음 날 아침.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이수연은 고윤재 때문에 잠에서 깼다.
고윤재는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이수연의 팔을 움켜쥔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이수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수연, 우리 아이 사진이랑 신상 정보, 네가 퍼뜨린 거야? 나한테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 이런 식으로 아이 신상이 알려지면 납치당할 수도 있어.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고윤재가 몰아붙였다.
“나한테 화가 났으면 나한테 따져.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까지 끌어들여!”
잠에서 제대로 깨지도 못한 이수연은 영문을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고윤재는 침대 옆에 놓인 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수연이 지난밤 마시다 남은 찬물을 그녀의 얼굴에 끼얹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잠옷까지 흠뻑 적셨다.
이수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제야 흐릿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나 아니야.”
이수연은 어이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고윤재는 동문 모임에서 정지안이 했던 말은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잡아뗐으니까.
‘나도 어젯밤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서야 처음으로 아이의 얼굴을 봤는데, 내가 대체 무슨 수로 사진과 신상 정보를 퍼뜨려?’
하지만 고윤재는 이미 이수연의 짓이라고 단정한 듯 따져 물었다.
“지안이가 그랬어. 우리 아이한테 악의를 품고 일부러 보복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다른 사람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이수연은 물끄러미 고윤재를 바라봤다.
고윤재는 원래 냉정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라면 섣불리 입을 열어 약점을 남기는 법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정지안과 아이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뒤 가리지 못하고 제 입으로 아이의 존재를 인정해 버렸다.
이수연은 고윤재의 손을 뿌리쳤다.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 사진 속 아이가 당신 아이인 건 인정하는 거네?”
고윤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잠시 침묵하던 고윤재는 결국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지안이가 유산하러 갔던 날 의사를 매수했어. 나한테도 계속 숨겼고.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늦은 뒤였어.”
잠시 말을 멈췄던 고윤재가 이내 덧붙였다.
“수연아, 이제 그 아이를 보안도 제대로 안 되는 곳에서 계속 살게 둘 수는 없어. 내가 데려올게.”
이어진 말은 더욱 기가 막혔다.
“그냥 네 아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키워. 앞으로는 우리 아이인 거야. 너도 이제 병원 다니면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순간 이수연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동안 견뎌 온 시험관 시술이 떠올랐다. 아이를 갖게 해 달라며 좋다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니고,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던 시간도 떠올랐다.
그 모든 고통을 견딘 건 단 하나 때문이었다.
고윤재의 아이를 갖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고윤재는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를 데려다 키우면 되지 않느냐는 말 한마디로 이수연이 견뎌 온 모든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어차피 며칠 뒤면 떠날 거니까.
이제 와 고윤재에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이수연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낸 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 대신 나도 원하는 게 있어.”
이수연은 잔뜩 구겨진 이혼 관련 서류를 꺼냈다.
“그 아이를 데려오는 걸 받아들이는 대신이야. 여기에 서명해 줘.”
이수연은 중요한 내용이 눈에 띄지 않도록 서류를 접은 채 고윤재에게 내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종이를 쥔 손끝에는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고윤재는 별다른 의심 없이 펜을 받아 들었다.
서류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은 채 이수연이 가리킨 곳에 곧바로 서명했다.
그제야 이수연은 손끝에 들어갔던 힘을 천천히 풀었다.
고윤재는 자신이 방금 어떤 서류에 서명했는지도 모른 채 이수연을 품에 끌어안았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사. 수연아, 미안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수연은 말없이 고윤재의 품에 안겨 있었다.
고윤재의 몸에서는 익숙한 향수 냄새가 짙게 풍겼다.
정지안이 가장 좋아하는 향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수연이 가장 싫어하는 향이기도 했다.
이수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곧 떠날 테니까.
제4화
이수연은 정지안까지 아이를 따라 집에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막상 이수연을 보자 정지안의 얼굴에 순간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동문 모임에서 이수연을 앞에 두고 큰소리쳤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수연아, 나 정말 잠깐만 여기 있을 거야. 율이가 여기 생활에 적응해서 더는 내가 필요 없어지면 바로 나갈게!”
남자아이는 긴장한 얼굴로 정지안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나쁜 아줌마! 우리 엄마 쫓아내지 마요! 엄마가 나가면 저도 따라서 나갈 거예요!”
정지안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이수연은 순간 정지안의 눈에 스친 도발 섞인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이수연이 아이를 갖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애써 왔는지는 주변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이수연의 집에 고윤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윤재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정지안과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율이 엄마를 왜 내보내겠어.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야.”
세 사람이 한 가족처럼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수연은 순간 자신이야말로 불청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지켜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이수연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수연아...”
정지안이 이수연의 눈치를 살피며 뒤늦게 불러 세우려 했다.
그러자 고윤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수연이는 요즘 돈도 안 되는 디자인 붙잡고 저러는 게 낙이야. 그냥 내버려둬.”
그 말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이수연의 귀에 들어왔다.
처음 결혼했을 때만 해도 고윤재는 이수연의 일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꺼이 피팅 모델이 되어 주며 이수연이 디자인한 옷은 깔끔하고 고급스럽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씨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국내외에 이름을 알리는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누구보다 자신 있게 말해 준 사람도 고윤재였다.
하지만 결혼한 뒤 이수연은 자신의 꿈을 뒤로 미루고 가정에 충실했다.
그렇게 하나둘 포기하며 뒷전으로 밀려난 이수연의 일은 어느새 고윤재에게 ‘돈도 안 되는 디자인’이 되어버렸다.
이수연은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고윤재는 점점 멀어지는 이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요즘 이수연은 지나치게 조용했기에, 사실 조금 전에 한 말도 일부러 들으라는 듯 꺼낸 말이었다.
이수연이 발끈해서 따져 묻든, 화를 내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내길 바랐다.
그런데 이수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수연이 정말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윤재는 이내 스스로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수연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혼하고도 결국 다시 나한테 돌아왔잖아. 그런 수연이가 이제 와서 나를 떠날 리가 없지.’
고윤재는 대수롭지 않은 생각이었다는 듯 넘겨 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지안에게 앞으로 지내게 될 방을 소개했다.
이수연은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작업실에서 그대로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재에 두고 온 디자인 원고가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곧 떠날 예정이니 자신의 물건도 미리 정리해 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온 이수연은 서재 문을 여는 순간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바닥에는 찢어진 종이 조각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수연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발치에 떨어진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몇 년 동안 공들여 완성한 디자인 원고였다.
그제야 바닥에 널린 종이 조각들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수년 동안 그리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완성한 디자인 원고가 모조리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정지안의 아들 고율이 서 있었다.
고율은 이수연의 물건만 골라내 하나씩 망가뜨리고 있었다.
순간 이수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여기 들어와도 된다고 했어!”
이수연은 곧장 고율에게 다가갔다.
평소 이수연은 누구도 이 서재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집사 차주원조차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도우미가 당황한 얼굴로 연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도련님은 집 안 어디든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된다고 하셔서...”
이수연은 고율을 한쪽으로 떼어 놓은 뒤 서둘러 남아 있는 원고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고율이 집 안이 떠나가도록 울음을 터뜨렸다.
“수연아, 너 내 아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정지안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 뒤로는 고윤재가 고율을 보호하라고 붙여 둔 경호원들까지 따라 들어왔다.
엄마가 나타나자, 고율은 언제 울었냐는 듯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망가뜨리던 고율은 이번에는 고윤재와 이수연이 함께 찍은 사진이 든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수연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
액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유리가 산산이 깨졌다.
튀어 오른 유리 파편 하나가 이수연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고율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쪽에 쌓여 있던 디자인 원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쁜 아줌마! 아줌마 때문에 우리 아빠랑 엄마가 같이 못 살았잖아요! 아줌마 물건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율이가 다 망가뜨릴 거예요!”
“안 돼!”
이수연은 다급히 고율을 막으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경호원들이 이수연의 양팔을 붙잡았다.
“지금 저 아이가 아니라, 나를 막은 거예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무슨 일이 생기든 도련님의 안전을 가장 먼저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사모님이라도 도련님께 위해를 가하려고 하시면 막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순간 이수연의 표정이 굳었다.
고윤재는 이수연이 고율에게 해코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미리 이런 지시까지 내려 둔 것이었다.
정작 지금 망가지고 있는 건 이수연이 지난 수년 동안 쌓아 온 결과물이었다.
수없이 밤을 새우며 그리고 고치기를 반복해 완성한 원고들이 눈앞에서 하나둘 망가져 갔다.
이수연은 필사적으로 팔을 빼내려 했지만 훈련받은 경호원들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놔요! 놓으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다.
눈앞에서 원고들이 망가져 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이수연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련마저 깨끗이 사라졌다.
얼마 뒤 고윤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고윤재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정지안은 재빨리 고율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아이의 팔을 몇 번 세게 꼬집었다.
“으악!”
고율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정지안은 곧장 고율을 데리고 고윤재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시퍼렇게 멍든 고율의 팔을 내보였다.
“율이가 수연이 심기를 좀 건드렸다고 애를 이렇게까지 때리려고 했어. 내가 어떻게 수연이한테 율이를 맡겨 놓고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어?”
정지안은 울먹이며 고율을 품에 끌어안았다.
“안 되겠어. 우리 그냥 여기서 나갈게.”
제5화
고율의 몸에 난 상처와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본 순간, 고윤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경호원들은 여전히 이수연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고윤재는 이수연이 아이에게 해코지하지 않는 이상 경호원들이 저렇게까지 막아설 리 없다고 생각했다.
“수연아,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고윤재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이수연의 눈과 마주친 순간,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고윤재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율이 몸이 온통 상처투성이잖아. 대체 왜 그랬어?”
이수연은 조금 전 정지안이 고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봤다.
정작 이수연은 고율을 다치게 한 적조차 없는데, 정지안은 일부러 아이의 몸에 상처를 내고 그 책임을 이수연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그건 정지안한테 물어봐. 정지안이 한 짓이니까.”
정지안이 당황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고윤재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지안이가 너한테 누명이라도 씌웠다는 거야? 거짓말로 빠져나가려면 적어도 말이 되게 둘러대!”
고윤재가 답답하다는 듯 몰아붙였다.
“너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됐잖아. 그래서 네가 율이를 키울 수 있게 하려고 지안이한테 부탁까지 한 거야. 그런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또다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수연이 임신하기 어려운 몸이 된 건 애초에 고윤재를 지키려다 크게 다쳤기 때문이었다.
이수연은 말없이 고윤재를 바라보다가 엉망이 된 서재로 시선을 돌렸다.
정작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아이에게 상처를 낸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고윤재는 이수연의 말보다 정지안의 말을 믿었다.
고율에게는 무조건적인 믿음과 애정을 쏟으면서, 이수연에게는 처음부터 의심을 품었다.
고윤재가 명령하듯 말했다.
“사과해!”
“내가 한 거 아니야.”
이수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순간 문득 결혼한 해에 떠났던 신혼여행이 떠올랐다.
해외에서 누군가 이수연에게 물건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운 적이 있었다.
아무도 이수연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지만, 고윤재만은 망설임 없이 이수연의 앞을 막아서고 나섰다.
“수연이가 안 했다고 하면 안 한 거야!”
당시에는 이수연의 결백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런데도 고윤재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이수연을 믿어줬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달라졌다. 정지안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이수연의 말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내가 어린아이를 해칠 사람이라고 믿는 거야? 아니면 그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나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이수연이 고윤재를 똑바로 바라봤다.
고윤재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얼굴을 굳힌 고윤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해.”
이수연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이수연의 어깨를 짓눌러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무릎이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 위로 그대로 떨어졌다.
날카로운 파편이 살을 파고들자, 순간 눈앞이 새까매질 만큼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수연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제로 사과까지 시킨 뒤, 고윤재는 직접 이수연의 상처를 치료해 줬다.
손길은 부드러웠고 상처를 닦아 내는 동작도 유난히 섬세했다.
조금 전 이수연을 유리 조각 위에 무릎 꿇게 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수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를 벌준 건 율이한테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어.”
고윤재는 상처를 소독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앞으로 너는 명목상으로라도 율이 엄마가 될 사람이잖아. 네가 잘못하고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면 율이도 보고 배울 거 아니야.”
이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끝까지 고윤재를 바라보지 않았다.
고윤재는 한숨을 내쉬며 이수연의 손을 잡았다.
“예전에 지안이랑 있었던 일은 전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율이가 있다고 해서 네가 고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려면 지안이도 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고윤재는 이수연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안방은 지안이랑 율이가 쓰게 하면 어떨까? 수연아, 너는 다른 방으로 옮겨.”
이수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모두를 위한 합리적인 해결책이라도 내놓은 듯 진지한 고윤재의 얼굴을 바라보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자리를 만들어 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정지안은 떳떳하게 얼굴을 드러내지도 못할 내연녀고, 고율은 불륜으로 낳은 사생아야. 평생 그 꼬리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순간 고윤재가 손을 들어 이수연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수연, 지나간 일은 이제 좀 덮고 넘어가면 안 돼? 율이까지 네 자식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잖아.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이수연은 뺨을 감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고윤재는 화를 삭이지 못한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고율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은 엄마, 아빠와 함께 큰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조르는 소리였다.
고윤재는 흔쾌히 허락했다.
곧 안방에 있던 이수연의 물건들이 하나둘 게스트룸으로 옮겨졌다.
이수연은 그 모습을 보러 가지 않았다. 서재 바닥에 쪼그려 앉아 갈기갈기 찢긴 디자인 원고를 한 장씩 주워 모을 뿐이었다.
그때 정지안이 느닷없이 곁으로 다가왔다.
“수연아, 사실 넌 진작 회복됐어. 더 이상 난임이 아니란 얘기야. 재결합하고 그렇게 여러 번 시험관 시술을 했는데도 왜 한 번도 임신이 안 됐는지 알아?”
이수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지안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오빠는 애초에 네가 아이를 낳는 걸 원하지 않았거든. 오빠가 아이를 낳아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나뿐이야. 나한테 유산하라고 한 적도 없어. 그때는 아이를 지운 것처럼 꾸며 준 거였어.”
정지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네가 시험관 시술하면서 맞았던 그 수많은 주사 있지? 사실 전부 시험관 시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주사였거든.”
이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을 모두 마친 정지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이수연은 멀어지는 정지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래서였구나...’
지난 몇 년 동안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들이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곤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미 겪을 만큼 겪었으니 이제 어떤 일을 마주해도 무덤덤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수연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 만큼 아팠다.
이수연은 고윤재가 마련해 준 게스트룸으로 가지 않았다.
새벽녘,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이수연은 미리 모아 둔 자료를 꺼냈다.
고윤재의 불륜을 입증할 증거와 정지안, 고율에 관한 자료였다.
이수연은 그 자료를 고윤재와 사업상 경쟁 관계에 있는 회사 대표에게 전부 보냈다.
전송 완료 표시가 뜨자 망설임 없이 휴대전화에서 유심칩을 꺼내 반으로 꺾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정말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이수연은 부러진 유심칩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윤재,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