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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피어난 꽃
어릴 적 기억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부터,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언니는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났으니 세상의 모든 귀하고 좋은 것은 마땅히 언니의 몫이어야 한다고. 도성의 사람들 역시 언니보다 명석하지 못하다며 나를 피하고 은근히 멸시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언니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꽃을 피울 시기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궁중 연회가 열리기 전, 어머니는 내게 일부러 칙칙한 초록색 치마를 보내오시며 언니의 기를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언니는 이미 미래의 태자비로 여겨지는 몸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옛날 도사가 우리 가문에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난 여성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게 꼭 언니 한 사람뿐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지난 세월의 인내는 그저 때를 기다린 것뿐이다. 모두가 나에게 물러서라고 한다면, 나는 오히려 빼앗을 것이다. 황후의 운명이라고 해서 어찌 꼭 태자비에 머물러야 한단 말인가. 중궁전의 주인이 되어 황제의 곁을 지키는 것 역시, 비할 데 없이 고귀한 운명이거늘.
챕터 (1)
第1章
어릴 적 기억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부터,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언니는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났으니 세상의 모든 귀하고 좋은 것은 마땅히 언니의 몫이어야 한다고.
도성의 사람들 역시 언니보다 명석하지 못하다며 나를 피하고 은근히 멸시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언니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꽃을 피울 시기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궁중 연회가 열리기 전, 어머니는 내게 일부러 칙칙한 초록색 치마를 보내오시며 언니의 기를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언니는 이미 미래의 태자비로 여겨지는 몸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옛날 도사가 우리 가문에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난 여성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게 꼭 언니 한 사람뿐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지난 세월의 인내는 그저 때를 기다린 것뿐이다.
모두가 나에게 물러서라고 한다면, 나는 오히려 빼앗을 것이다.
황후의 운명이라고 해서 어찌 꼭 태자비에 머물러야 한단 말인가.
중궁전의 주인이 되어 황제의 곁을 지키는 것 역시, 비할 데 없이 고귀한 운명이거늘.
제1장
어릴 적 기억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부터,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언니는 황후가 될 명운을 타고났으니, 세상의 모든 귀하고 좋은 것은 마땅히 언니의 몫이어야 한다고.
나는 무척이나 순종적이었다.
언니가 눈부신 비단옷을 두를 때, 나는 낡은 명주 적삼을 입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가 언니에게 시와 글을 가르칠 때, 나는 저택의 나이 든 어멈을 따라 조용히 글자를 익혔다.
시회에서 언니가 화려한 재기를 뽐낼 때,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할 뿐이었다.
도성의 모든 이가 나를 피하고 꺼렸다.
언니처럼 총명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계집이라며 노골적으로 업신여겼다.
나는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훗날, 시간이 흘러 언니는 도성 제일의 재녀로 칭송받게 되었다.
반면 나는 여전히 구석에 처박힌 볼품없는 명문가의 여식에 불과했다.
궁중 연회를 하루 앞둔 저녁.
어머니가 사람을 시켜 초록색 긴 치마 한 벌을 보내왔다.
"둘째 아씨. 마님께서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큰아씨께서는 장차 태자비 마마가 되실 몸이니 연회에서 절대 큰아씨의 빛을 가려서는 아니 된다고 하시었사옵니다."
나는 늘 그랬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옷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에 모든 것을 알아낸 참이었다.
그 옛날, 늙은 도사가 예언했던 고씨 가문의 여식.
황후가 될 명운을 타고났다는 그 여식이 오직 언니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내게 언니의 빛을 가리지 말라 강요했다.
그렇다면 기어이 그 빛을 훔쳐 주리라.
누가 그러던가, 태자에게 시집가야만 황후가 될 명운을 이룰 수 있다고.
황제에게 시집가는 것 역시 그 명운을 이루는 길이었다.
"둘째 아씨, 마님께서 대청으로 드시라 하옵니다."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어머니 곁을 모시는 계집종이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소인이 주제넘게 한마디 올리자면, 아씨께서는 지체 없이 가시는 편이 좋을 것이옵니다. 공연히 마님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내 몸종 소은이 욱하여 나서려는 찰나, 내가 한발 빨리 손을 들어 녀석을 제지했다.
"알았으니, 가서 말씀드리기나 하거라."
건방진 계집종을 슬쩍 올려다보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한편, 소은의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터져나온 목소리에는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이제는 저택의 개나 소나 다 아씨를 업신여기옵니다! 아씨께서는 어찌하여 나리나 마님께 말씀드려 이 억울함을 풀지 않으시는 겝니까!"
나는 묵묵히 시선을 내리깐 채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나는 여전히 지나온 그 세월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곱 살 때, 고유진이 내가 가장 아끼던 헝겊 인형을 빼앗아 갔다.
울며 어머니께 일렀지만 내게 돌아온 건 사당에서 사흘 동안 무릎을 꿇으라는 벌이었다.
열두 살 때, 몰래 그림을 그리다 고유진에게 들켰다.
고유진은 내가 자신을 뛰어넘을 것이라며 울부짖었고, 아버지는 내 그림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보름 동안 사당에서 무릎을 꿇으라는 벌을 내리셨다.
열세 살 때, 연회에 가기 전 복숭아빛 옷을 골라 입었다.
고유진은 나를 비웃으며 춘정을 품었다고, 사내를 꼬시려는 천박한 짓이라고 조롱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웃어넘기며 고유진의 성격이 솔직해서 그렇다며 감쌌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내 운명은 오직 내 손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잠시 후, 찻잔을 비운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소은아, 가자."
"예, 아씨."
대청에 들어서자,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어머니의 낯빛이 보였다.
어머니는 부채를 팔랑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일찌감치 사람을 보냈거늘, 이제야 행차하시다니 둘째의 몸가짐이 여간 귀하신 게 아니구나. 세 번 네 번 부르지 않으면 아예 발걸음조차 떼지 않을 작정이냐?"
나는 못 들은 척 넘겼다.
아직은 얼굴을 붉힐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머니, 부르셨사옵니까. 무슨 연유로 찾으시었는지요."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당부할 것이 있어서다. 내일 열리는 궁중 연회는 겉으로는 명문가 여식들의 꽃놀이라 칭하나, 실상은 태자비를 낙점하기 위한 자리란다."
어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세월, 재주로나 품행으로나 유진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터. 더욱이 유진이는 황후가 될 명운까지 타고난 아이다. 애초에 네가 감히 견줄 상대가 아니지."
"제가 정녕 못난 것입니까, 아니면 어머니께서 보려 하지 않으신 겁니까."
나는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어머니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분통을 터뜨렸다.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제법 혀를 놀리는구나! 내 어릴 적부터 그리 단속했거늘, 사사건건 네 언니를 질투하고 물고 늘어지니 대체 어찌 가르쳐야 그 미련한 고집을 꺾겠느냐!"
"됐다! 긴말할 것 없다. 연회에서 행여라도 같잖은 수작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그저 죽은 듯이 엎드려, 네 언니를 돋보이게 할 역할이나 충실히 해내란 말이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머니는 이내 누그러진 어조로 덧붙였다.
"이 어미도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네 언니가 태자비가 되어 훗날 중궁전의 주인이 되면 너를 위해 번듯한 혼처 하나쯤 못 잡아주겠느냐."
"허나 그것도 네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연회를 앞두고 급작스레 몸져눕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지."
가슴속에서는 서늘한 비웃음이 일었지만, 나는 겉으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나는 어머니를 빤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 보거라."
다음 날.
나는 초록색 긴 치마를 입고, 자주색 진주 장식 치마를 차려입은 고유진의 뒤를 따랐다.
"어머니, 아무 염려 마시어요! 저와 태자 전하는 어릴 적부터 각별한 사이였사옵니다. 오늘의 연회는 그저 통과의례일 뿐이지요!"
오늘따라 기분이 한껏 들뜬 고유진은 화려한 치마를 펄럭이며 작은 새처럼 지저귀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심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아버지, 어머니. 만약 언니의 혼사가 엎어진다면... 그리고 황실에 시집가는 사람이 바로 저라면, 그때 두 분은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 겁니까.'
제2장
"자, 자, 때를 놓칠라. 어서 가거라!"
아버지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나를 스윽 훑어내렸다.
"자매끼리 서로 이끌고 밀어주어야 더 멀리 갈 수 있는 법이다."
"아버지도 참,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전 신분도 고귀하고 어려서부터 피나는 노력을 다하였사옵니다. 어찌 곁다리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이옵니까!"
"오냐오냐, 내 딸의 말이 다 맞다. 그럼 이 아비는 집에서 좋은 소식이나 기다리고 있겠다!"
내 가슴속에는 티끌만 한 파문도 일지 않았다.
지독하게 익숙해져 버린 삭막한 평온뿐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후작부의 마차가 대문 앞에 당도해 있었다.
큰 마차 한 대, 작은 마차 한 대.
선두의 마차는 넓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발판에조차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반면, 뒤쪽의 마차는 비좁고 남루했다.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이라도 삐거덕대며 부서질 것만 같았다.
차별은 늘 이토록 노골적이었다.
나는 묵묵히 낡아빠진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고유진이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그저 억누르지 못한 오만함과 우월감이 뚝뚝 흘러넘칠 뿐이었다.
덜컹이는 마차 안.
나는 쉴 새 없이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고서현, 이런 삶을 사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앞으로의 길은 네가 직접 정하는 거야.'
상념이 잦아들 무렵, 소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궁문에 당도하였사옵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황궁의 정문 앞.
나는 멈춰 서서 안쪽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화려하고 웅장한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서현아, 무얼 그리 넋을 놓고 보느냐?"
고유진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 웃음기 띤 낯짝 뒤로는 숱한 계산과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악독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내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굴었다.
멀리서 보면 아무런 앙금 없이 그저 함께 연회에 참석한 사이좋은 자매처럼 보였을 것이다.
"저 두 분이 고씨 가문의 영애들이시지?"
"두 자매의 우애가 참으로 깊어 보이는군."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은 온통 우리가 사이좋은 자매라는 칭찬뿐이었다.
고유진의 입가에는 가식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후원 구석에 다다랐을 때.
고유진은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
"됐다, 되도 않는 광대 짓은 접어야지. 네년의 그 궁상맞은 냄새가 내 옷자락에 밸까 역겨우니까. 오늘 하루, 쥐 죽은 듯 엎드려 있는 게 좋을 거다."
고유진은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떠오른 듯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가벼운 웃음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짙은 악의가 서려 있었다.
"명심하거라. 오늘 밤 무슨 일이 생기든 넌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어머니를 졸라 널 백정의 첩으로 시집보내 버릴 테니까. 어차피 난 미래의 황후야. 네년의 목숨줄 따위는 내 손끝 하나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사지로 퍼져나갔다.
그제야 나는 똑똑히 깨달았다.
지난 세월 동안 고유진은 단지 나를 이기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예 나를 철저히 짓밟고 망가뜨리려 했다는 것.
나는 그런 고유진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떻게 그런 짓을!"
내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못 할 건 또 뭐란 말이냐?"
"이 거대한 황궁의 주인이 바로 내가 될 터인데!"
"나는 이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몸이다!"
그랬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고유진까지 내게 얌전히 굴라고 강요했다.
그들은 고유진이 오늘 밤 궁중 연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기필코 태자비가 될 것이고, 반드시 황후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여긴 황궁이야! 어떻게 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어! 폐하께서는 아직 강건하시거늘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이건 폐하를 능멸하는 크나큰 불경이야! 경거망동하지 마. 이 천하는 폐하의 것이니 네가 오만하게 혓바닥을 놀릴 자리가 아니야."
고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흥, 말은 제법 번지르르하게 하는구나. 허나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내 가엾은 동생아. 똑똑히 새겨두거라. 운명은 정해졌고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걸. 내가 오늘 한 말 뼛속 깊이 새겨둬. 네 미래가 어찌 될지는 온전히 네 태도에 달렸으니까."
"알았어."
내게 경고를 마친 고유진은 잔뜩 신이 나서 앞장서 걸어갔다.
한편, 후미진 모퉁이 그늘.
그곳에 은밀히 숨겨져 있던 황금빛 도포 자락을, 고유진은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제3장
궁중 연회에는 수많은 명문가 여식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꽃을 감상하곤 했는데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태감이 목청을 높였다.
"현비 마마 납시오!"
나는 뒤쪽에 서서 사람들을 따라 외쳤다.
"현비 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현비.
바로 태자의 생모였다.
"됐다. 오늘 너희들을 부른 건 그저 꽃이나 보며 경치를 즐기자는 뜻이니, 너무 격식을 차릴 것 없다. 다들 편히들 있거라."
"망극하옵니다, 마마."
사람들은 서서히 흩어졌다.
나는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숨어들어 조용히 연회장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적지 않은 귀족 여식들이 이번 연회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현비 마마의 눈에 들고자 기를 썼다.
당연히 고유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유진은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현비와 무슨 이야기를 그리 나누는지, 현비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씨 가문 여식은 참으로 재미있구나."
"마마께서는 모르실 겝니다. 고씨 가문에는 본디 두 명의 여식이 있사온데, 다른 한 명도 한번 보시지요."
누군지 단번에 알았다.
고유진의 친구로, 평소 그녀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자였다.
지금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 예를 갖췄다.
"소녀 고서현, 현비 마마를 뵈옵니다."
현비 마마는 내 인사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고유진을 돌아보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같은 고씨 가문 여식이거늘, 하나는 꽃처럼 화사하고 다른 하나는 어찌 저리 노인네처럼 칙칙하게 입었는지. 참으로 하늘과 땅 차이로다."
이윽고 사람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마마께서 모르셔서 그렇사옵니다. 비록 같은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왔다고 하나, 학식이나 용모나 천지 차이이옵니다. 소녀와 저 아이는 본디 격이 다르지요."
"마마께서는 그저 장난감이나 구경거리쯤으로 여기시옵소서. 저런 아이 때문에 마마의 흥을 깰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네 입담이 제법 쓸 만하구나."
나는 속으로 훤히 꿰뚫어 보았다.
황후가 될 명운을 타고났다는 그 소문 때문에, 현비는 진작부터 고유진을 점찍어 둔 터였다.
지금 이리 유난을 떠는 건, 고유진에게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아끼는지 보여주려는 속셈일 뿐이다. 나아가 고씨 가문과 동궁을 단단히 옭아매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허나 저들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아무리 얄팍한 수를 써도, 결국 선택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그분의 몫이라는 것을.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나직하고 유려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마마마, 무슨 이야기를 그리 나누십니까? 무척이나 소란스럽사옵니다."
"태자 전하 납시었사옵니다!"
"명문가의 영애들을 불러 꽃놀이를 즐기던 참이었다. 그중에서도 고씨 가문의 적녀가 퍽 눈에 띄는구나."
태자는 그 말을 듣고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어마마마 말씀이 백번 지당하옵니다. 소자 역시 그리 생각하옵니다. 그러하오니, 어마마마께서 나서주시어 아바마마께 성지를 청해주시옵소서. 고씨 가문의 적장녀를 태자비로 맞이하고 싶사옵니다."
"좋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이 어미가 저 아이의 의중을 물어보마. 아무리 네가 원한다 한들, 저 아이가 싫다 하면 나 역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이번에도 현비 마마는 한껏 모양새를 갖췄다.
대놓고 고유진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속셈이었다.
그때, 고유진이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의 눈에 든 것은 소녀의 크나큰 복이옵니다. 소녀, 기꺼이 받들겠사옵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현비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
"두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통하였으니 내 내일 당장 폐하께 사혼을 청하겠노라!"
고유진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조롱했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그녀는 곧장 내게 달려와 옷소매를 쥐고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서현아, 내가 정말 태자 전하께 시집가게 되었어! 너도 나를 위해 기뻐해 줄 거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유진의 손에 갑자기 손수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내 소매에서 흘러내린 모양새였다.
"어머? 서현아. 네 손수건이 떨어졌네."
고유진은 의아해하면서도 짐짓 난처한 기색을 꾸며냈다.
"어머나, 이게 웬일이람. 여기에 뉘 이름이 수놓아져 있는 게야? 설마 마음에 품은 사내라도 생겼는데 차마 말하지 못한 거니? 걱정 마. 마침 오늘 현비 마마께서도 자리하고 계시잖니. 마마께 부탁하여 사혼을 청하면 될 터이니, 이 언니도 한시름 덜겠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급히 그녀를 막아서려 했지만 한발 늦은 뒤였다.
제4장
그때, 고유진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서현아, 네가 어찌 태자 전하의 존함을 수놓았단 말이냐!"
말을 마친 고유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네가 태자 전하를 연모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이 언니가 어찌 네가 마음에 품은 분을 빼앗을 수 있겠니."
그 순간, 현비 마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저런 발칙한 마음을 품다니! 권세에 눈이 멀어 체면조차 내던진 게로구나!"
눈물범벅이 된 고유진이 현비 마마를 향해 애원했다.
"마마, 소녀의 동생 역시 전하를 일편단심으로 연모하고 있사옵니다. 부디 제 동생이 평처(平妻) 신분으로라도 태자 전하께 시집갈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평처.
말이야 번지르르하지만, 실상은 그저 격이 조금 높은 첩일 뿐이다.
그때, 귓가에 이내 태자의 혐오감 가득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마마마, 유진이가 저리 간청하니, 소자 역시 저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태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고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첩으로 거두겠사옵니다!"
"허나 저리 염치없는 자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역겹사옵니다. 이것이 소자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이옵니다."
나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이 연극은 진작부터 짜여 있던 판이었다.
나까지 동궁에 옭아매어 고씨 가문 여식 둘을 모두 거느리려는 속셈. 그리고 나를 철저히 짓밟으려는 고유진의 더러운 심산이었다.
'그래서 내게 그리도 고분고분하게 굴라고 했던 건가? 이미 다들 입을 맞춘 일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원치 않았다.
'고유진, 네가 이리도 독하게 군다면, 나 역시 자비는 없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동자에는 결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소녀는 원치 않사옵니다."
일말의 떨림도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소녀는 억울한 누명을 썼사옵니다."
그때, 현비가 격노하며 소리쳤다.
"방자한 것! 물증이 이리도 명백하거늘, 어디서 감히 발뺌을 하느냐! 너를 동궁에 들이는 것은 오직 고씨 가문과 네 언니의 체면을 봐서다. 네가 정 원치 않는다면, 평생을 사찰에 처박혀 여승으로 늙어 죽거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체면을 내던지고 목숨을 걸어 싸우지 않으면 내겐 정말 퇴로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마마께서는 소녀의 변명은 단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으시고, 진상을 조사하겠다는 말씀조차 없이 이미 결론을 내리셨사옵니다. 소녀는 이 처사가 불공평하다 여겨지옵니다. 그러니 승복할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쩌겠다는 것이냐!"
현비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소녀는 오직 공정한 판결을 원하옵니다."
"비록 태자 전하라 하실지라도, 한 여인의 일생을 이리 함부로 결정지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로다!"
불쑥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당대의 황제, 폐하였다.
나는 바로 바닥에 엎드린 채 말을 이었다.
"소녀는 태자 전하의 평처로 시집가고 싶지 않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