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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군의 배신
고시우는 일찍이 공주와의 혼인을 거절했다. 정조를 잃고 두 다리마저 못 쓰게 된 나를 정실로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내를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혼인한 지 십 년이 되던 해, 고시우가 한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여인은 온갖 교태를 머금은 절세가인이었고, 나와는 판이했다. 얼마 뒤, 나는 죽은 딸을 품에 안고 누각에서 몸을 던졌다. 그러자 고시우는 미쳐 버렸다. 고시우는 자기 살을 베어 피를 내어 나한테 먹이며, 울부짖으며 죽지 말라고 애원했다.
챕터 (1)
第1章
고시우는 일찍이 공주와의 혼인을 거절했다.
정조를 잃고 두 다리마저 못 쓰게 된 나를 정실로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내를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혼인한 지 십 년이 되던 해, 고시우가 한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여인은 온갖 교태를 머금은 절세가인이었고, 나와는 판이했다.
얼마 뒤, 나는 죽은 딸을 품에 안고 누각에서 몸을 던졌다.
그러자 고시우는 미쳐 버렸다.
고시우는 자기 살을 베어 피를 내어 나한테 먹이며, 울부짖으며 죽지 말라고 애원했다.
제1화
고시우가 반년 동안 타지에 나가 일을 보고 돌아왔을 때, 곁에는 낯선 여인이 한 명 더 있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시어머니는 내게 고시우의 첩을 들이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고시우를 대신해 나를 내치겠다고 했다.
나는 창백한 얼굴로 시어머니와 맞서 따지고 있었다.
고시우가 달려와 나를 감싸며 말했다.
"어머니, 제 일은 어머니께서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시어머니는 얼굴을 굳힌 채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었다. 고시우는 내게 내밀었던 손을 도로 거두더니, 내 의아한 눈빛 속에서 시종에게 나를 안아 들게 했다.
그제야 나는 그의 곁에 온갖 교태를 머금은 절세가인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안한 느낌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 여인은 내게 곱게 절을 올리며 수줍은 기색을 띠고 말했다.
"저는 월미라고 합니다. 언니께 인사를 올립니다."
"월미가 정성을 다해 언니를 모실 테니, 서방님께서 아무 걱정 없이 지내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서방님?'
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어 고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한 채 월미가 자기 팔을 끼고 다정하게 곁에 기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아무 상관도 없는 외인이 된 듯했다.
내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 아파지며 고시우에게 물었다.
"서방님, 첩을 들이시려는 겁니까?"
고시우는 난처한 기색을 띠며 켕키듯 내 곁에 앉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월미가 전에 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소. 평범한 첩으로 들이는 것은 너무 억울하니, 월미를 평처(平妻)로 맞이해 남은 생을 편히 살게 해 주려 하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시우를 바라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손을 움켜쥔 채, 기침과 가쁜 숨을 멈추지 못했다.
"우리 혼인할 때, 평생에 두 번째 여인은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잊으신 겁니까?"
고시우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온화하던 눈길이 무심코 월미에게 향했다가, 이내 좀 당황한 듯 내 손을 잡았다.
"그저 명분 하나일 뿐이오. 월미는 나를 구해 주었다는 이유로 온갖 구설에 시달렸소. 그대도 예전에 겪어 봤잖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그대이오. 하지만 월미를 외면할 수는 없소. 그저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으려는 것뿐이오."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겠소?"
참으로 가소로운 말이었다.
나는 고시우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 내고, 떨리는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고시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답답한 듯 고개를 돌렸다.
월미는 고시우의 옷자락을 붙잡고 가슴을 감싼 채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젓자, 고시우의 눈빛에는 금세 연민이 어렸다.
혼인한 지 십 년 만에 고시우가 처음으로 내게 냉랭한 표정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옥주, 언제부터 그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된 것이오?"
"그대가...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구려..."
고시우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고 월미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자,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가 치밀어 올라, 한 모금 토해 냈다.
고시우는 내 서방님이자 사촌 오라버니였다. 세상 사람들은 고시우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내라고 했다.
고시우에게 시집간 것은 내게 하늘이 내린 복이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먼저 달을 얻는다고 했으니, 온 세상의 신불께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나 역시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전에 우리 집안이 몰락했을 때, 나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경성까지 가 이모님에게 의탁했다. 이모님은 고시우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를 거두어 주셨다.
고시우는 내게 더없이 잘해 주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선비로서의 맹세까지 저버리고, 싸움질이며 욕설이며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훗날 내가 두 다리를 못 쓰게 되고 성정까지 크게 변해 걸핏하면 고시우에게 화를 내도, 고시우는 처음과 다름없이 나를 대하며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고시우는 심지어 나를 위해 장공주의 청혼까지 거절했다.
그해 고시우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여 말을 타고 거리를 누볐다.
고시우는 풍채가 빼어나고 수려한 데다 학문에도 뛰어나서 장공주는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고시우가 혼인을 거절하자 장공주는 크게 노하여 고시우를 죽도록 때린 뒤 고씨 저택 문 앞에 내던져서 그때 입은 상처는 지금까지도 지병으로 남아 있었다.
제2화
폐하께서는 고시우에게 관직과 작위를 내려 보상하려 하셨지만, 고시우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어의를 모셔 와 내 두 다리를 치료해 달라고 청했다.
나는 고시우가 어리석어 화가 나면서도, 고시우의 다정함에 한없이 감동했다.
고시우는 늘 나를 애틋하게 품에 안고, 굳은 눈빛으로 소중한 약속을 했다.
"나는 이 결정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부인으로 맞이할 사람은 오직 그대, 전옥주뿐이오."
나는 눈물을 닦아 내고, 장공주에게 맞아 부러진 고시우의 검지를 안쓰럽게 어루만졌다.
"저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오르지도 못하고, 서예의 대가가 되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후회 없습니까?"
"저와 혼인하면 온갖 구설을 감당해야 합니다."
"옥주!"
고시우는 나를 더욱 힘껏 끌어안더니, 이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대와 혼인하는 것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평생의 소원이기도 하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소!"
"내 말이 거짓이라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도 좋소."
그토록 나를 아껴 주며 수많은 약속을 했던 사내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변해 버렸다.
고시우와 불쾌하게 헤어진 뒤, 우리는 꼬박 한 달 동안 만나지 않았다.
고시우는 월미를 데리고 온갖 연회에 참석하며 사람들에게 월미를 소개하기에 바빴고, 나는 병든 딸 유안을 밤낮없이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안이 내게 물었다.
"아버지는요? 왜 절 보러 오지 않으시죠?"
"설마 아버지께서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유안이 실망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먼저 고시우에게 고개를 숙여 와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고시우는 집에 없었고, 내 기다림 끝에 온 것은 비단옷으로 한껏 치장한 채 기고만장한 월미뿐이었다.
나는 담담한 눈빛으로 월미를 바라보며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월미는 눈을 휘며 웃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손을 들어, 내 뺨을 후려쳤다.
"이 불구년아, 주제 파악을 한다면 화리(和離)를 청하거라! 쓸모없는 딸 하나를 내세운다고 서방님이 너한테 마음이 약해질 줄 아느냐?"
"너처럼 멋도 모르고 재미도 없는 데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 년이 무슨 낯으로 나와 서방님을 다퉈?"
월미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욕설을 퍼부어 대자, 내 시녀 여희가 나를 뒤로 감싸며 곁에 있던 뜨거운 찻물을 월미에게 그대로 끼얹었다.
월미의 팔이 벌겋게 데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천한 계집종 주제에! 네 주인처럼 천하기 짝이 없구나! 저년을 당장 묶어라!"
월미가 그토록 기고만장할 줄은 몰랐고, 시종들조차 내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아서 나는 월미에게 머리를 짓눌린 채 여희가 모욕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월미는 몸이 떨릴 정도로 웃더니 내게 침을 뱉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침내 월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금비녀를 뽑아 월미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내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부인인 나한테 감히 그토록 날뛴단 말이냐?"
월미가 다급히 몸을 피하는 바람에 나는 허공을 찌르고 바닥에 쓰러졌다. 월미는 분에 못 이겨 온 힘을 다해 내 다리를 몇 번이나 걷어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월미는 내 입을 틀어막은 뒤 의자를 들어, 내 다리를 내리쳤고, 의자 모서리가 뼈를 집요하게 찍어 눌렀다.
두 다리는 아무런 감각도 없어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 마음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평소 내게 많은 은혜를 입었던 시종들마저 월미에게 붙어 내 앞에서 기세를 부렸다.
그대로 월미의 손에 맞아 죽겠다고 생각한 순간,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고시우가 월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월미는 비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서방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다. 헛된 꿈은 그만 꾸거라."
고시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월미가 말없이 내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은 부어오른 뺨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유도 없이 불안감에 휩싸여 고시우에게 해명하려 했지만, 고시우가 갑자기 달려와 나를 밀치는 바람에 머리를 침상 모서리에 부딪혀 크게 부어올랐다.
"옥주!"
고시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다급히 내 상처를 살폈고, 눈에 어린 걱정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월미의 놀란 외침에 고시우의 시선은 다시 월미에게 향했다.
월미가 뺨을 감싸 쥔 채 팔에 난 화상을 내보이자, 고시우는 나를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옥주, 월미가 그대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었거늘 어찌 그리 모질게 구는 것이오? 불만이 있다면 월미를 괴롭히지 말고, 내게 말하시오."
제3화
"월미는 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니 잘 대해 주기를 바라오. 더는 이처럼 질투에 눈이 먼 행동은 하지 마시오."
햇살이 눈 부신 날인데, 나는 온몸이 떨릴 만큼 추웠다.
나는 침상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마의 상처가 몹시 아팠지만, 그보다 고시우가 나를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수년간 쌓아 온 정이 도리어 비웃음거리로 변해 버릴 줄은 몰랐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시우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고시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차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요 며칠 내가 그대를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니, 앞으로는 곁을 잘 지키겠소."
월미의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다시 고시우의 옷소매를 붙잡고 몸을 떨며 아프다고 호소했다. 그러자 고시우는 곧장 월미를 안아 들고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며, 걸음을 옮기면서 사람을 시켜 의원을 불러오게 했다.
고시우가 또다시 내게 등을 보이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혼인한 지 십 년인데, 정말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월미가 나타난 뒤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제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하신 적이 있고 다정한 얼굴을 보여 주신 적은 있습니까? 제 얼굴에 난 상처는 보이십니까..."
"유안의 병세는 신경 쓰지도 않으시고, 오늘이 유안의 생일이라는 것도 잊으신 채, 다짜고짜 저를 탓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반년 동안 정말 변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서방님입니다..."
고시우가 걸음을 멈추고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유안 같은 어린아이가 무슨 생일을 지낸단 말이오? 그대와 다투고 싶지 않으니, 평소 할 일이 없거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지 말고 무언가라도 찾아서 하시오."
어느새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고 나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거의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서방님에게 시집오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서방님 때문에 제가 정절을 잃고 두 다리까지 못 쓰게 되었는데, 서방님이 저를 맞이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니요..."
고시우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지만, 화를 내기 전에 시종에게 월미를 먼저 데려다주라고 일렀다.
고시우의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내 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힘이었다.
"지난 일을 이제 와서 왜 또 들추는 것이오? 내가 그대를 위해 그 많은 세월 동안 온갖 구설과 조롱을 견뎠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하단 말이오?"
"나는 그대를 위해 눈앞의 출세까지 포기하고 그대 한 사람만을 지켜 왔소. 지금은 그저 은혜를 갚는 것뿐인데, 대체 왜 그리 나를 몰아붙이는 것이오? 왜?"
고시우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타지로 떠나기 전에 내게 선물했던 백자를 내던져 산산조각 내더니, 평소의 예의와 절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고시우가 마지막으로 그토록 이성을 잃었던 것은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앙갚음했을 때였다.
'대체 언제부터 고시우가 이렇게 낯선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일까?'
알고 보니 고시우는 오랜 세월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게 베풀었던 그 모든 다정함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어깨는 온통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고시우는 힘이 다 빠진 것처럼 손을 놓았다. 나는 고시우의 옷깃을 움켜쥔 채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정말 후회하시는 겁니까?"
고시우는 잠시 침묵하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대는 영원히 내 부인이고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오."
고시우는 또다시 미련 하나 없이 떠나 버렸다.
나는 허겁지겁 여희에게 기어가 떨리는 손으로 여희를 묶어 둔 삼베 줄을 풀어 주었다.
여희는 내 눈물을 닦아 주고 나를 품에 안은 채 웃으며 달랬다.
"마님, 울지 마십시오. 우시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지켜 내지 못했다..."
나는 원망스럽게 두 다리를 내리치며 눈물은 손등 위로 떨어졌다.
"여희, 떠나거라. 어쩌면 이게 내가 널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씨 가문의 대권은 줄곧 시어머니 손에 있었고, 시어머니는 내가 혼자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셨다. 그리고 고시우도 내가 집안 잡무에 관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 고시우가 일찍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고시우 곁에 있을 때만 사람들이 나를 존중했고, 그때만 나는 비로소 인간으로 대접받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여희는 자신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아 들어 침상에 눕힌 뒤, 세심하게 내 이마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고, 부모님께서 아직 살아 계시던 집과 고시우가 내게 선물했던 검은 고양이를 꿈에서 보았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프며 나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밖은 어느새 칠흑같이 어두워져 촛불 하나, 별빛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고양이를 불렀지만, 평소라면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달려들어 내 몸에 올라타던 검은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제4화
마음이 불안해졌다. 고양이는 얌전하고 말도 잘 들었으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늘 내 마당에서만 웅크리고 지냈고, 한 번도 함부로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고시우가 내게 이 고양이를 선물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고시우 때문에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고시우는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해 목숨을 끊을까 봐 밤낮으로 내 방 밖을 지켰다.
하지만 나는 고시우를 보기만 하면 원망 안 할 수가 없었다. 고시우가 약속을 어겨 나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 원망스러웠고, 너무 늦게 와서 내가 모든 것을 잃게 만든 것도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고시우는 더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대신 검은 고양이를 데려와 나와 함께 지내며 나를 위로하게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마음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고, 고시우가 정성껏 나를 돌봐 주며 여러 약속까지 해 주자 나는 고시우를 내 서방님으로 받아들였다.
그 시절 고시우는 더없이 행복해했다.
고시우는 검은 고양이를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아 들고 일부러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옥주는 내 미래 부인이다! 수고양이로서 남녀 사이에 함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르냐?"
나는 모처럼 웃었고,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뒤 처음으로 고시우에게 좋은 낯을 보였다.
고시우는 조심스레 내 앞으로 다가왔고,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채 벅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옥주, 그대에게 평생 잘해 주겠소."
나는 그 말을 듣고 살며시 웃으며, 고시우의 기대 어린 눈빛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고시우라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놓칠 수 없었다.
타지로 떠나기 전에도 고시우는 돌아오면 검은 고양이에게 짝을 찾아 주어, 우리처럼 평생 사이좋게 지내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방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건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다급하게 여희를 불렀다.
하지만 여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어서 바퀴가 달린 의자에 올라탄 뒤 소리를 따라갔고, 고시우의 서재 앞에서 멈췄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들었고, 고시우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문을 밀어 열었고, 넋을 잃은 채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고시우의 동공이 가늘게 수축했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눈을 부릅뜬 채 경련하는 검은 고양이를 막아섰다.
"야옹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린 검은 고양이의 작은 몸 아래로 번진 피를 보았다. 검은 고양이의 눈빛은 너무나 애처로웠고, 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더는 체면 따위를 지키지 못하고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검은 고양이는 힘없이 야옹거리며 몇 번 몸부림치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고시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고시우를 마구 때리고 손을 깨물었더니 입안으로 흘러든 피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옥주, 저 짐승이 사람을 해쳤소. 진정하시오!"
"지금 그대 모습이 어디가 부인답다는 것이오?"
나는 충혈된 눈으로 검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떨리는 손으로 두 눈을 감겨 주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고, 마치 수천수만 개의 바늘이 찔러 대는 것 같았다.
고시우의 안색이 새까맣게 굳었다. 평소면 늘 부드럽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도 지금은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었다. 고시우가 나를 단숨에 일으켜 세우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허리를 감싸서 몸을 지탱했다.
"저 짐승이 월미의 얼굴을 다치게 했소. 여인이 자신의 용모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그대도 알 것이오. 내가 더 얌전하고 더 예쁜 고양이를 한 마리 다시 구해 주겠소."
고시우는 검은 고양이를 내게 주던 날, 검은 고양이와 자신이 평생 내 곁을 지켜 주겠다고 했던 말을 벌써 잊은 듯했다.
하지만 고시우가 말했던 '평생'은 너무나 짧아서, 미처 마음의 준비조차 할 틈이 없었다.
고시우의 눈동자에 미쳐 버린 듯한 내 모습이 비쳤지만, 내 목소리는 이상하게 차분했다.
"고시우, 우리 화리합시다."
시어머니가 바라던 일이었으며, 월미가 더욱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다. 고시우 역시 속으로 기뻐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고시우는 도리어 화를 내면서 내 손에서 검은 고양이의 사체를 빼앗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화로 안으로 내던졌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